책상엔 샤프와 모래시계, 노트...허준이 "매일 점심엔 같은 메뉴만 먹어"

프린스턴=김진화 기자,이채린 기자 2023. 6. 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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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즈상 수상 1주년...프린스턴대 현지 인터뷰
연구실 칠판 앞에 선 허 교수. 칠판 중앙엔 9세 아들 허단이 직접 쓴 글자 WELCOME과 왼쪽 하단엔 2세 아들 허솔이 그린 낙서가 보인다. 사진작가 차윤교 촬영

지난해 7월 5일 한국계 수학자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40·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의 연구실. 필즈상 수상 1주년을 앞둔 지난 5일(현지시간) 직접 찾은 그의 연구실은 단출했다. 책상엔 여러 노트 뭉텅이, 샤프펜슬, 1리터 우유팩만한 모래시계가 전부였고 바닥엔 요가매트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저는 자극적인 것에 약한 사람이에요. 잘 중독되죠. 그래서 일상을 깨트릴 수 있는 자극은 거의 피합니다. 지금처럼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어요.” 연구실의 단출함에 놀라자 돌아온 그의 답이다. 

허 교수 연구실 책상에는 노트 뭉텅이, 샤프펜슬, 모래시계와 정다면체 나무 모형이 놓여 있다. 허 교수는 박사시절 첫 연구 주제였던 정다면체의 모형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다. 사진작가 차윤교 촬영.

허 교수는 놀랄 만큼 필즈상 수상 전 일상을 똑같이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해 필즈상 수상 인터뷰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 조용히 앉아 명상하거나 조깅하고 오전 9시에 학교에 도착해 오전중 연구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해서 오후 9시에 잠드는 하루 일과가 거의 똑같다”고 했다. 이날도 8시 30분 집에서 나와 걸어서 연구실에 도착했다. 이따금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기도 한다. 

요가매트와 모래시계의 쓰임새를 물었다. 요가매트는 종종 누워 생각할 때 쓴다. 그 생각을 직접 손으로 노트에 써내려가며 정리한다. 모래시계가 잴 수 있는 시간은 15분이다. 허 교수가 집중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는 “이 모래시계로 잴 수 있는 15분이 집중력이 약한 제가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깊은 생각이 필요할 때는 모래시계를 한번 뒤집어서 집중했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또 뒤집는 과정을 반복하며 연구한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오전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낸 뒤 점심시간엔 혼자 슬그머니 연구실을 나와 식당으로 향한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지난달에도 갔던 똑같은 식당, 똑같은 메뉴다. 한 중동 음식 전문점의 ‘샤와르마(케밥처럼 구운 고기를 빵에 싸먹는 중동 요리)’다. 허 교수는 “새로운 음식을 고르고 맛보면 정신이 산만해지는데, 일종의 불필요한 자극이어서 일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모든 일상을 사실상 연구에 방해받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허 교수가 점심시간마다 찾는 한 중동 음식 전문점 ‘마문스 팔라펠’의 샤와르마다. 사진작가 차윤교 촬영

좋아하는 노래도 너무 빠져 들까봐 연구할 때는 아예 듣지 않는다. 심지어 읽고 싶은 논문이 있어도 꾹 참을 때도 있다. 그는 “수학 연구는 능동적으로 생각하며 하는 것”이라면서 “논문을 많이 읽으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했다. 또 “기존 연구 혹은 유행하는 연구를 조합해서 연구성과를 내려는 얄팍한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자신의 연구실 외에 연구를 위해 찾는 공간은 3층 건물인 프린스턴 공공도서관이 유일하다. 그 중에서도 어린이 도서 코너가 있는 3층을 즐겨 찾는다. 그는 “도서관의 암묵적인 규칙인지 모르겠지만 성인 도서 코너가 있는 1, 2층은 너무 조용해서 작은 소리도 안내려고 신경써야 해 오히려 힘들다”며 “동료를 3층으로 데려가 연구 이야기를 나누는데, 물론 오후 3시가 지나면 하교한 어린이들이 너무 많아 대화하기가 어렵다”고 웃으며 말했다.

허 교수가 지금 보내는 일상과 루틴에는 이유가 있다. 필즈상 수상으로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1년 전 그는 연구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터뷰와 강연, 대담은 물론 당시 TV 출연 제안, 도서 출간 제의 이메일이 허 교수의 메일함으로 쏟아졌다. 허 교수 처지에선 일상이 깨진 셈이었다. 

지난해 9월 미국에 돌아온 그는 연구에 방해되는 일은 모두 끊었다. 아니 일뿐만이 아니라 연구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와 단절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구와 관련없는 대중 활동은 지난해 아들의 학교 반 친구 7명 앞에서 수학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는 짧은 강연이 전부였다. 

필즈상 수상 유명세를 탄 김에 잠시나마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연구를 쉴 법도 하지만 허 교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철저히 배제할 만큼 수학에 욕심내는 이유는 뭘까. 돌아온 그의 대답은 너무 단순했다. 여전히 지금도 수학이 재밌기 때문이라는 답이다. 

프린스턴대 정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허 교수. 사진작가 차윤교 촬영.

“수학을 왜 해야 하냐고 물으면 사실 꼭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건 아니죠.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야 수학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나 음악처럼 사람이 재밌어서 하는 것 중 필요한 건 없잖아요. 수학도 마찬가지예요. 수학을 꼭 해야 한다고 당위성을 부여하면 수학에 대해 재미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요.”

필즈상 수상 이후 새 연구논문도 공개됐다. 수상 분야인 대수기하학을 통해 조합론 문제를 해결하는 ‘조합 대수기하학’으로 1980년대 제시된 조합론 추측인 ‘브리로스키의 추측’과 ‘도슨-콜번의 추측’을 대수기하학으로 해결한 내용이다. 그레이엄 덴헴 미국 웨스턴대 교수, 페데리코 아르딜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와 공동 연구한 논문을 올 상반기 발행한 수학 분야 학술지 ‘미국수학회보’에 발표했다. 

허 교수는 이번 연구논문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해 그는 “감자를 보여주고 상대방이 감자 모양이 어떤 건지 바로 알아차리게 할 순 있지만, 사진 없이 모양을 묘사해서 알아차리도록 하려면 쉽지 않다”면서 “이처럼 공동연구 끝에 2018년에 두 추측을 해결할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기하학적인 직관을 형식화하는 과정이 어려워서 논문을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허 교수의 석사 시절 지도교수인 김영훈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는 “미국수학회보는 수학계 최고 학술지 중 하나로, 여기에 한 번이라도 논문이 실리면 수학자들은 큰 영예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필즈상 수상자는 한 분야에서 자신을 증명했으니 새로운 분야에서도 능력을 보이고 싶어 연구 분야를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허 교수는 “연구 분야를 바꾸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면서 “제가 배우는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라서 지금 와서 다른 분야로 바꾸면 아마 논문 하나 쓰는 데 10년이 걸릴 것”이라면서 웃었다. 

여전히 공동연구도 열심히 하고 있다. 방문 직전인 5월 말에도 4명의 공동연구자가 허 교수 연구실을 방문해 일주일 정도 집중 연구를 했다. 허 교수는 고등과학원 석학교수로 조만간 한국을 찾아 연구를 진행한다. 7월 초 서울에서 열리는 ‘제1회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 참석한다.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7월 19일 문을 여는 고등과학원 수학연구소 ‘허준이수학난제연구소’ 개소식에도 참여한다.

“목표는 없어요. 목표가 일시적으로 동기 부여가 될 수는 있겠지만, 목표 설정 자체가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어려운 목표라면 분명히 언젠가 가까이 가기 어려운 지점이 생길 텐데 그런 지점을 맞닥뜨렸을 때 마음이 힘들고 잡념이 생기잖아요. 목표를 가지지 않는 게 앞으로 나아갈 때 산만해지지 않는 방법인 것 같아요.” 뻔한 마지막 질문에 뻔하지 않은 답을 준 허 교수의 앞날에 대한 기대감을 안은 채 연구실을 나왔다. 

[프린스턴=김진화 기자,이채린 기자 evolution@donga.com,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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