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살인·동물실험… ‘귀신 씐 물건들’의 기묘한 사연[북리뷰]

박세희 기자 2023. 6. 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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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의 시간표
정보라 지음│퍼플레인
부커상 후보 올랐던 정보라의
‘저주토끼’ 이은 환상호러 소설
출구 안 보이는 터널·계단 등
익숙한 괴담의 이미지 선보여
부조리한 사회 날카롭게 지적
여성·성소수자 등엔 위로 건네
서늘함과 따뜻함 동시에 안겨
정보라 작가의 신작 ‘한밤의 시간표’는 귀신 들린 물건들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수상한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묶은 연작 소설집이다. 각 물건이 지닌 기묘한 사연은 오싹하고 무서운 괴담이면서도 동시에 슬며시 온기가 도는 이상한 여운을 남긴다. 게티이미지뱅크

귀신 들린 물건들을 모아놓은 연구소. 환한 낮에도 왠지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에서의 야간 순찰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각 연구실의 문이 잘 잠겨있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지만 주의사항이 있다. 기척이 들려도 무시할 것, 돌아보거나 말을 걸지 말 것, 혼자 있을 때 오는 전화는 받지 말 것. 역시나, 야간 순찰을 도는 이들에게 차례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지난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최종후보에 들어 화제를 모았던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사진)가 이번엔 작정하고 ‘귀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신작 ‘한밤의 시간표’(퍼플레인)다. 연작소설의 형태를 띤 신작은 연구소 직원들이 겪은 각종 기이한 이야기와 연구소에 보관된 귀신 씐 물건들의 기기묘묘한 사연을 7편의 이야기로 나누어 펼쳐낸다. 주로 연구소 신입 직원인 ‘나’에게 ‘선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지는데, 책을 덮고 난 후엔 이상하게 가슴 한편에서 따뜻함이 부푼다.

우선 정 작가는 익숙한 도시 괴담을 활용한다. 달리고 달려도 끝이 나지 않는 터널, 오르고 올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계단 등. 어디선가 보거나 들어본 괴담들을 작가는 새로움을 더해 선보인다. 터널 출구까지 남은 거리가 759만3625㎞로 무자비하게 늘어나고, 끝이 안 보이는 계단에서 자신을 내려찍으려는 거대한 운동화를 피하려다 미끄러진 이는 심연으로 추락한다.

괴담 곳곳에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도 스며있다. 사회의 각종 불합리한 일에 직접 나서며 데모에 앞장서는 그답다. 작가는 죽은 친구의 부인과 바람을 피우다, 결별을 고하는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한 한 유부남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왜 안 만나줘’를 외치며 남자들은 자신의 소유라고 점찍은 여성의 집에 찾아가 흉기 난동을 벌이기도 하고(2021년 4월), 자신이 직접 만든 폭발물을 터뜨리기도 하고(2020년 10월) 혹은 피해 여성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살해하기도 한다(많다). ‘왜 안 만나줘’를 주장하는 남성의 여성 살해 역사는 유구하다”고 꼬집는다.

정 작가가 이전 작품들에서부터 끊임없이 다뤄온 테마 ‘복수’와 ‘저주’는 이번 작품에서도 작동한다. 연구소에 보관돼 있는 ‘손수건’엔 조국을 멸망케 하고 지아비를 살해한 적국 군인들에게 원한을 품은 한 여인의 영혼이 깃들었는데 손수건의 저주는 적국(敵國)의 군대장 일가를 몰살한 데 이어, 어머니의 편애를 등에 업고 다른 형제들이 벌어온 돈을 자신의 사치 활동에 몽땅 털어 넣은 막된 한 아들을 미치게 만들어 죽게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끝나지 않는 터널에 갇혔던 성소수자 ‘찬’이 터널에서의 경험으로 연인 ‘각’을 향한 마음을 깨닫는 등, 저주는 생의 의지를 지닌 약자와 소수자에게 되레 아픈 과거를 딛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선한 자에게는 다정한 미래를, 악한 자에게는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정 작가의 소설이 서늘한 동시에 따뜻한 이유다.

오싹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얼어붙은 마음 한편에 따스하게 퍼지는 온기는 책 마지막에 실린 이야기 ‘햇볕 쬐는 날’을 통해 더욱 명확히 시각화된다. 물건에 붙은 존재들을 더 빨리 해방시키려 물건들을 한낮 마당에 꺼내 햇볕을 쬐게 할 때, 이유 없이 못 박혀 죽은 고양이와 고통스러운 실험을 당하다 죽은 양은 푸른 잔디 위 서로에게 기댄다. 기묘한 따뜻함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이를 보며 ‘선배’는 “뭘 남길 생각하지 말고 그냥 떠나는 게 최고”라고 이야기하고, ‘나’는 “모두가 깨끗하게 떠날 수 있었다면 이 연구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어딘가, 인간이 저지른 이유 없는 악의로 상처 입고 죽은 이들을 잠시 돌봐주는,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연민으로 기묘한 돌봄을 실천하는 이 연구소와 같은 곳이 존재하길, 아니 존재하지 않길 바라본다. 260쪽, 1만58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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