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우리나라에서만 신상 공개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
지난 5월,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5살 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엄마를 살인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 실종된 아이의 시신 일부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체포되던 날 미국 언론사들은 용의자가 아이의 엄마이고, 이름은 알렉서스 타니엘 넬슨(Alexus Tanielle Nelson)이며, 나이는 27살이라는 사실을 얼굴 사진과 함께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유아 살해 같은 충격적인 강력 사건의 경우에만 실명 보도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지난 5월에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힐튼호텔의 매니저가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객실에서 자고 있던 손님들의 발가락을 빤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잔인하다기보다는 황당하고 엽기적인 쪽에 가까운 사건이었지만 미국 언론사들은 체포된 매니저의 이름이 데이비드 패트릭 닐(David Patrick Neil)이고 나이는 52살이라는 사실 등을 얼굴 사진과 함께 보도했습니다.
범죄 피의자의 실명을 보도하는 건 미국 언론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4월 일본에서는 기시다 총리에게 한 청년이 폭발물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언론은 체포된 청년의 이름이 기무라 유지라는 사실을 즉각 보도했고, 범인의 종교적 성향이나 가족 관계 등에 대한 정보도 기사에 담았습니다. 총리를 향한 테러 시도보다 중대성이 떨어지는 사건의 경우에도 일본 언론은 통상적으로 피의자의 실명을 비롯한 신상 정보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일본은 피의자 신상 보도…우리나라는 왜 논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범죄 피의자의 신상 공개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는 근본적 이유가 이것입니다. 신상 공개를 둘러싼 수사기관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2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사(또는 개인)들은 수사기관의 발표를 기다리지 않고 범죄 피의자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의 기준과 별개로 범죄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보도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범죄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 논란 자체가 거의 불거지지 않습니다. (피의자가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신상 공개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만 범죄 피의자 신상 보도가 - 피의자가 공인이 아닐 경우 - 사실상 금지되어 있고, 범죄자 또는 피의자 신상 공개를 둘러싼 논란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신상정보 공개 논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언론사들 역시 미국이나 일본 언론처럼 주요 범죄 피의자의 실명과 사진 등을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의 유명 강력 사건인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이나, 1990년 초반에 발생한 지존파 사건을 다룬 옛날 신문이나 방송을 찾아보면 피의자들의 얼굴은 물론 물론 피의자 이름의 한자까지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상황이 바뀐 걸까요?
1998년 대법원판결 계기로 '익명 보도' 원칙 자리 잡아
판결 내용은 이렇습니다. 1990년 서울서초경찰서는 이혼 소송 중인 남편으로부터 위자료를 받아내기 위해 폭력배에게 남편 등을 폭행하도록 교사한 혐의로 여성 A 씨 등 2명을 구속했습니다. 이 사건은 한 지상파 방송사와 주요 일간지에 보도됐고 피의자인 A 씨의 실명과 사진 등도 공개됐습니다. 그러나 A 씨는 결국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고 이후 자신의 실명과 얼굴 사진을 보도한 언론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쟁점은 범죄 혐의와 함께 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보도한 것이 공공성 또는 공익성이 있는지였습니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범죄의 내용(혐의 내용 등)을 보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있지만, 범죄자 또는 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보도하는 것은 범죄 내용을 보도하는 것과 같은 공공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조금 길지만 판결문 내용 중 핵심적 대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의 범죄 사건 보도는 범죄 행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사회적 규범이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위반하는 경우 그에 대한 법적 제재가 어떻게, 어떠한 내용으로 실현되는가를 알리고, 나아가 범죄의 사회 문화적 여건을 밝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강구하는 등 여론 형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따라서 대중 매체의 범죄 사건 보도는 공공성이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 자체를 보도하기 위하여 반드시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명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에 관한 보도가 반드시 범죄 자체에 관한 보도와 같은 공공성을 가진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중략) 평범한 시민으로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적인 인물이 아닌 이상 일반 국민들로서는 피고 언론 각 사가 적시한 범죄에 대하여는 이를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그 범인이 바로 A와 B라고 하는 것까지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대법원 1998. 7. 14. 선고 96다17257 판결)
이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언론사의 범죄 내용 보도의 공익성은 인정되지만, 범죄 피의자의 신상에 대한 보도는 피의자가 공인이라는 이유로 공익성이 확보되는 경우 등이 아니라면 공공성이 없다는 법리를 확립한 것입니다.
게다가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은 단지 민사 손해배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 국가 중 매우 드물게도 사실을 적시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형사처벌 하는 나라입니다. 만약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하고서도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 위법성이 조각되기 위해서는 - 사실을 적시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범죄자 신상 보도는 공공성 없다'는 판결의 모순
문제는 이와 같은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서 '범죄 내용에 대한 보도는 공공성이 있지만, 범죄 피의자 신상 보도는 공공성이 없다.'라는 경직된 법리가 확립됐다는 사실입니다. 신상정보 공개에 따른 공익이 분명히 존재하거나, 신상정보 공개 보도를 금지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만큼 중대한 사유가 없는 경우에도 '(피의자가 공인이 아니라면) 범죄 피의자 신상 보도는 공공성이 없다.'라는 법리 때문에 실명 보도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한 언론사가 마약류관리법을 위반한 한 정신과 의원의 실명을 공개하는 보도를 한 적 있습니다. 대구에서 정신과 의원을 운영하던 의사가 마약류취급자가 아닌 직원을 시켜 마약류가 포함된 약을 조제하도록 했다가 적발됐는데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병원 이름을 기사에 명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신과 의사는 실명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의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언론사가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1998년 대법원 판례에서 제시한 '범죄의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있지만, 범죄 피의자의 신상을 보도하는 것은 공공성이 없다.'라는 기준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범죄에 대해서는 보도하면서, 법률을 위반한 의사의 실명을 보도하는 것이 공익성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앞으로 해당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환자들로서는 자신에게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조제약과 관련한 규정을 어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와 관련해 이연갑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지난 2009년 발표한 「실명 보도와 불법행위 책임 - 대법원 2007. 7. 12. 선고 2006다65620 판결(공보 불게재) -」라는 논문에서 대법원 판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판결을 비판하면서 정신과 의원의 실명을 보도한 행위에 대해서는 공익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피의자 신상 보도의 공익성 인정 기준 제시하는 판례 필요
그렇다면 범죄자 신상 공개 논란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대법원이 '범죄자 또는 피의자 신상 보도는 공공성이 없다.'라는 경직된 법리를 깨고, 공적 인물로 보기 어려운 범죄자의 신상 정보 보도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범죄자 또는 피의자 신상정보 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판례를 내놓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런 판례가 확립된다면 언론사들도 판례에서 제시된 구체적 기준에 따라 공익성 여부를 판단해 범죄자 또는 범죄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보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판례는 언론사뿐만 아니라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현재 수사기관의 신상정보 공개는 법률에 따라 이뤄지고 있지만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사건이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등에 한해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결정에 따라 피의자의 신상정보가 공개되고 있는데, "잔인하고 중대한"이라든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등과 같은 요건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대중의 관심 여부에 따라 신상정보 공개 여부가 좌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 피의자의 신상정보도 공익성이 있을 수 있다.'라는 전제하에서 신상정보 공개의 공익성이 보장되는 조건을 구체화하는 판례가 제시된다면 수사기관의 신상정보 공개 행위 역시 뚜렷한 기준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 21조 1항에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명시돼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알 권리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고, 국민의 알 권리가 충족은 자유로운 표현이 보장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범죄자의 신상정보 역시 국민이 알아야 할 정당한 권리가 있는 정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5년 전에 선고된 "일반 국민으로서는 범죄에 대하여는 이를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지만, 범죄자가 A와 B라는 사실까지 알아야 할 정당한 이익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라는 경직된 판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억압돼 왔습니다.
최근 분출하고 있는 범죄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 요구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요구가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법관들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법이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것은 사적 제재의 만연이라는 폭력적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임찬종 기자 cjy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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