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과 극한의 취향, 셀럽의 사적인 공간에 대한 기록

김명희 기자 2023. 6. 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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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건, 그 사람의 취향과 세계관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흥미로운 방법이다. 이브 생 로랑부터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이름만 들어도 혹할 유명인들의 공간을 기록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김명희 기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사랑의 도피처로 만들었던 ‘큐폴라’.
* 코코 샤넬은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무렵인 1918년 파리 캉봉가 31번지 저택을 매입했다. 샤넬의 1호 부티크이자 그녀의 집무실이기도 했던 이곳에는 고대 그리스부터 이집트, 이탈리아,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아름다운 가구와 소품이 가득했다. 독특하게도 테이블 위에는 황금 사자상이 있었는데, 연인 보이 카펠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후 상심을 달래고자 떠났던 베니스 여행에서 구입한 것이다. 샤넬은 이 사자상을 통해 세상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와 영감을 얻었다.

* 이탈리아 사르데냐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얀 모래가 펼쳐진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섬이다. 이 섬의 해변과 인접한 곳에 돔 형태의 조금 독특하고 기괴한 구조물이 있다. '큐폴라’란 이름이 붙은 이 건축물은 '욕망’ ' 붉은 사막’ '밤’ 등의 영화로 세계 3대 영화제를 모두 휩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자신의 뮤즈였던 배우 모니카 비티와의 사랑의 은신처로 삼고자 했던 곳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을 맞으면서 큐폴라는 폐허로 버려지고 만다. 부식된 콘크리트와 뜯긴 페인트, 먼지 쌓인 가구는 마치 붕괴된 사랑의 단면 같아 가슴이 아프다.

건축가 에일린 그레이의 별장 ‘빌라 E-1027’.
* 아일랜드 귀족 가문 출신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에일린 그레이는 연인 장 바도비치와 휴가를 보내기 위해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카프 마르탱에 '빌라 E-1027’이라는 별장을 지었다. E는 에일린(Eileen)을, 10은 장(Jean)의 이니셜인 알파벳 10번째, 2는 바도비치(Badovici)의 이니셜인 알파벳 2번째, 7은 그레이(Gray)의 이니셜인 알파벳 7번째를 의미한다. 하지만 둘만의 사랑의 암호로 가득했던 별장 건축이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의 관계도 끝났고 에일린은 장에게 별장을 넘기고 떠났다. 당시 에일린의 라이벌이었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이 집에 무단 침입해 화려한 프레스코화를 마구 그려 넣는 바람에 에일린이 그와 절연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서울 중구 회현동 피크닉 갤러리에선 이 낭만적이고도 쓸쓸한 사랑의 흔적, 성취와 좌절의 기록 그리고 취향의 극단과 영감의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수아 알라르 사진전: 비지트 프리베(Visite Prive′e)’를 통해서다. 프랑스 출신의 프랑수아 알라르는 전 세계 명사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사진으로 기록해온 작가다. 그가 촬영한 장소들은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화려한 아파트부터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 천장화로 장식된 16세기 궁전을 망라한다. 그 사사로운 장소들을 통해 건축, 문학, 디자인, 미술, 패션 등 다방면에 걸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 사조들을 관통한다는 것이 피크닉 측의 설명이다.

인테리어업에 종사하는 부모를 따라 어려서부터 박물관과 벼룩시장을 다니며 안목을 키워온 프랑수아 알라르는 파리 국립 미술학교에 조기 입학했고, 10대라는 이른 나이에 잡지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1980년대 콘데나스트의 편집국장인 알렉산더 리버만에게 스카우트돼 '보그’ '베니티 페어’ '하우스&가든’ 등 유명 매거진의 표지와 화보를 촬영하기도 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력 덕분에 그의 작품 가운데는 특히 디자이너들의 공간이 많다.

드리스 반 노튼의 저택을 모티프로 한 전시 공간.
1984년 촬영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저택은 방대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거실 한가운데 놓인 몬드리안의 그림이다. 이브 생 로랑은 1965년 몬드리안의 추상화에서 영감을 받은 미니드레스를 선보였고 이를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몽환적 분위기의 화려한 패턴과 프린트 덕분에 '패션계의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의 공간은 꽃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득한 시적인 곳이다. 당연히 이 화려한 저택은 그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을 터다. 마크 제이콥스는 1997년부터 2013년까지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로 재직하며 구사마 야요이를 비롯한 수많은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루이비통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올려놓았다. 마크 제이콥스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미술품에 투자한 것으로 유명한데, 알라르는 이러한 마크 제이콥스의 면모를 조명한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속 장면 같은 수영장 풍경.
전시 작품 가운데는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상징과도 같은 수영장 사진도 있다. 영국 출신인 호크니는 1960년대 미국으로 이주,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날씨와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수영장’ 시리즈를 선보였다. 19세의 알라르가 찍은 수영장 사진은 마치 호크니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청량하다. 거대한 거미를 형상화한 조각 '마망(Maman)’으로 잘 알려진 루이즈 부르주아의 남루한 아파트를 보노라면 상처로 가득했던 그녀의 내면 그리고 작품 세계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된다. 이탈리아 정물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아틀리에 풍경은 그가 그린 정물화처럼 단정해 그림과 혼동될 지경이다.
코코 샤넬의 거실에 놓인 황금사자상.
전시의 타이틀 '비지트 프리베(Visite Prive′e)’는 프랑스어로 '사적인 방문’ '은밀한 방문’을 뜻하는 말로, 그가 9년 전에 발표한 사진집 제목이기도 하다. 전시회를 기획한 김범상 피크닉 대표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개인의 취향과 안목, 욕망과 상처가 드러나는 다양한 공간을 조금 더 은밀하고 섬세하게 경험해보길 바란다"면서, 우리의 공간도 자신의 열정과 시간이 응축된 하나의 작품이 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이브생 로랑의 영감 가득한 거실.
피크닉은 전시 기획사 글린트가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1970년대 지어진 제약 회사 건물을 현대적인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이곳에는 갤러리 외에도 소품 편집 숍과 카페, 바, 이충후 셰프가 이끄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제로컴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록을 가득 안은 정원과 명동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상 뷰가 아름다우니 이곳을 방문한다면 놓치지 말기를 권한다. 전시 기간은 7월 30일까지이며, 관람료는 성인 1만8000원이다.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 같은 아틀리에
#전시 #셀럽공간 #여성동아

자료&사진 피크닉 제공

김명희 기자 may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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