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백작부인이 되다

관리자 2023. 6. 9.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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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대부분의 중장년 남성이 그렇듯 아침밥에 몹시 연연한다.

매일 밥과 국이나 찌개, 반찬 3∼4개가 갖춰진 아침상을 받아야 가장으로서 대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마친 남편에게 커피와 과일을 담은 접시를 전하며 말했다.

"30여년간 생활비를 한푼도 주지 않고 설거지나 청소 등 살림도 돕지 않는 백수 남편이 이렇게 디저트까지 챙겨받는 경우는 드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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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대부분의 중장년 남성이 그렇듯 아침밥에 몹시 연연한다. 매일 밥과 국이나 찌개, 반찬 3∼4개가 갖춰진 아침상을 받아야 가장으로서 대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찬 투정이나 음식 맛 지적을 하지 않는 것이 생존전략이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마친 남편에게 커피와 과일을 담은 접시를 전하며 말했다. “30여년간 생활비를 한푼도 주지 않고 설거지나 청소 등 살림도 돕지 않는 백수 남편이 이렇게 디저트까지 챙겨받는 경우는 드물어요.”

커피를 마시며 “옛날 귀족들은 다 그렇게 살았다”고 당당히 말하는 남편에게 “귀족들은 영지나 보석·하인·예술품 등 자산이 있었지만 당신 자산은 뭔데?” 하고 물었다. 남편은 아주 평화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답했다. “내 자산은 마누라지.”

억장이 무너지고 짜증이 나야 마땅한 상황인데 그 남편에게 30여년을 세뇌당한 마누라인 나는 ‘귀족’이란 단어에 꽂혔다.

상상이지만 만약 귀족 신분이라면 국적은 어느 나라일까. 영국·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 등등을 떠올리다가 스페인으로 정했다. 귀족도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등 서열이 있는데 겸손하면서도 익숙한 백작 작위가 어울릴 것 같았다.

그다음은 백작 가문의 성이었다. 섬 이름을 딴 프랑스의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있고 요즘 인기 웹툰 ‘백작가의 불청객들’의 필데트 백작 가문도 있다. 국적이 스페인이기에 스페인어 가운데 행복을 뜻하는 ‘펠리츠(Feliz)’로 정했다. 남편은 돈키호테와 비슷하니 돈 펠리츠 백작, 부인인 나는 이사벨라 펠리츠 백작 부인이다. 고향은 발렌시아가 좋을 듯했다.

가짜 백작 가문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 혼자 키들거리다가 ‘혹시 내가 우울증의 반대인 조증이 아닐까’란 의심도 들긴 했다. 더구나 상상력이 풍부한 청년도 아닌 60대 할머니가 말이다.

그럼 어떤가. 심각하고 진지하게만 살기에 인생은 너무 길다. 백수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내가 해석하고 받아들이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중년에 사업이 망해 백수가 됐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은 잘나가던 남편의 친구들도 대부분 은퇴했다. 천하태평인 데다 자존감 높은 남편 덕분에(?) 나는 쉬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세상이 내게 시디신 레몬을 던져주면 불평하지 않고 설탕을 부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마시면 된다. 걱정과 불안·고민은 사실 흔들의자다. 그 흔들의자는 우리의 몸과 정신을 흔들어놓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잠시 흔들리다 일어나 근심을 날려버려야 한다. 흔들바위 같던 고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조약돌만 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런 과도한 낙천성 탓에 대단한 부와 성공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방배동에서는 가장 자주 웃는 할머니임엔 틀림없다. 90세의 한 할머니가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라고 하지만 살아보니 매일 자주 웃는 사람이 승리자야’란 말을 하셨단다. 나는 매일 은은하고 잔잔하게 승리의 발걸음을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제 백작 부인의 귀족다운 우아함만 익히면 된다.

유인경(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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