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영업 비밀’을 밝힙니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2023. 6. 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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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써 간신히 먹고사는 사람의 ‘영업 비밀’을 살짝 흘린다. 음식이라는, 사물에 육박하자면 조리의 기술만큼이나 ‘말’을 잘 새기고 풀어야 한다. 가령 1876년 이후 조선의 세관(稅關) 업무를 다룬 문서를 연다고 치자. 그때까지 온 지구를 잇는 무역은 항구와 항구의 국제적인 그물망을 따라 일어났다. 그래서 한문 사용자들은 세관을 일러 ‘해관(海關)’이라 했다. 오늘날에도 세관의 중국어 어휘는 해관이다. 바다를 건너온 사물의 이름은 당연히 해관의 문서에 남는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아울러 나라와 나라가 맺은 조약의 부록이나 부속에도 통관이 예상되는 사물의 이름이 남게 마련이다. 예컨대 이들 문서에는 ‘의대리괘면(意大利掛麵)’ 같은 말이 보인다. 의대리는 이탈리아, 괘면은 가락을 세로로 길게 걸어 말린 국수를 뜻한다. 그렇다. 마른 이탈리아 파스타를 조선 관리는 의대리괘면이라 일렀다. ‘점심류(點心類)’라는 말도 쉽지 않다. 여기서 ‘점심’은 끼니가 아니다.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면면한 중국 ‘딤섬(點心)’의 뜻도 3분의 1, 별미 간식의 뜻도 3분의 1, 잘 빚어 구운 과자의 뜻도 3분의 1씩 껴 있다. 어찌된 일인가. 독해는 형태소만 붙들고 하는 짓이 아니다. 시대도 급소다.

18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푸젠(福建)과 광둥(廣東)의 설탕은 대륙의 북동쪽 끝까지 미친다. 둥베이(東北)와 산둥(山東)의 콩기름은 중국 전역에 퍼진다. 남쪽에는 이미 땅콩기름이 있었다. 대륙 남북의 설탕과 기름이 만나니 월병을 비롯한 과자며 사탕지(砂糖漬) 따위의 생산도 함께 늘었다. 사탕지란 과일 또는 과채를 시럽(syrup)에 절이거나 조리거나 적셔 만든 과자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흔한 탕후루(糖葫蘆)가 곧 사탕지의 일종이다. 덧붙이면 이때의 수입품 목록 속 ‘설탕수’란 설탕물이 아니라 시럽이다.

이런 별미에 차 한잔까지 있다면 풍속을 이룰 만하지 않은가. 영국제국이 중국에서 한창 차를 수입하고 있을 즈음, 중간 계급 이상의 중국인들은 오후의 찻상에 딤섬이나 설탕 쓴 별미를 곁들였다. 이를 ‘점다(點茶)’라 했다. 점다가 영국식 ‘오후의 홍차’에 앞선다. 19세기 조선 해관 문서의 ‘점심류’는 앞서 말한 내력을 다 쥐고 있다. 한 번 더 요약하면, ‘점심류’란 점다의 간식을 필두로 해 과자에 수렴하는 먹을거리를 가리킨다. 또한 유럽식 스위트(sweet), 디저트(dessert)까지 포괄한다. 수분 날린 유럽산 과자, 설탕 때려 박은 파운드케이크, 초콜릿 등은 기름종이와 깡통에 포장되어 19세기 지구를 누볐다. 개항장에서는 중앙정부에 유럽산 과자의 조달을 품의하기도 했다.

가배(咖啡, 珈啡) 또는 가배차로 기록된 커피, 한자 거치지 않고 한글로 바로 쓴 ‘고고아(cocoa·코코아)’ 따위도 해관을 지났다. 술이 빠지랴. 와인은 ‘서양 포도주’, 그 가운데서도 보르도 와인은 ‘복이탈(卜爾脫)’, 샴페인은 ‘삼편주(三鞭酒)’로 썼다.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에 등장시킨 술 베르무트(wermut, vermouth)도 한글로 바로 썼다. ‘월뭇’, 베르무트는 월뭇이라 했다. 맥주와 함께 기억할 만한 어휘는 ‘상주(常酒)’이다. 일상생활 중 아무 때고 마실 수 있는 도수 낮은 술이라는 뜻이다. 19세기 해관 문서의 주류 항목에 이 말이 있다면, 그건 그냥 맥주이다. 지면이 허락되는 한에서 ‘영업 비밀’을 살짝만 흘렸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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