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농어촌버스 권리선언

기자 2023. 6. 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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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안전벨트를 매주세요.” 항공사 승무원의 인사가 아니라 근래 경기도 광역버스 기사들에게 듣는 인사다. 승객들도 내리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열에 아홉은 하고 내린다. 몇년 전만 해도 보기 어렵던 흐뭇한 광경이다. 하차 전에 자리에서 미리 일어나지 말라는 거듭된 홍보로 수도권 버스에서는 벨을 누르고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뒤 안전하게 내리는 문화도 자리를 잡아간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해방 이후 국가 인프라가 부족해 한국의 버스는 노선과 차량운영의 재량을 모두 민간회사가 갖는 민영제였다. 그러다 도시에 전철이 촘촘하게 깔리고 자가용 이용이 늘면서 버스회사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 결과 돈 되는 노선만 다니려 하고 서비스 질도 떨어져 시민들 불만은 높았지만 뚜렷한 해결책도 없었다. 이에 노선관리의 권한을 지방자치단체가 가져오고 민간버스가 운행을 맡은 뒤, 무료환승제를 골자로 한 준공영제가 도입되는 지역들이 늘어났다. 공공서비스마저 시장에 맡기려는 민영화 전성시대에 버스만큼은 공공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중이다

반면 인심 좋고 물 좋다는 농어촌버스에 탈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든다. 대부분 고령의 승객이건만 몸이 튀어나갈 듯 곡예운전이 많아 젊은 축에 속하는 나도 진땀이 나고 멀미가 난다. 행선지를 묻거나 미처 벨을 누르지 못해 내려달라는 노인 승객들에게 운전기사가 지청구를 늘어놓는 민망한 상황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차량에 비치된 ‘교통불편신고엽서’를 꺼내 이 만행을 낱낱이 적어 민원을 넣을까 싶지만, 핑계 없는 불친절은 없다.

농어촌버스는 운전기사의 근무조건이 도시에 비해 훨씬 열악하다. 준공영제의 핵심인 1일 2교대도 갖춰져 있지 않고, 곡선과 비탈구간이 많아 운전이 까다롭다. 노선도 길어 정거장에 시간 맞춰 대려면 거칠게 내달려야 한다. 종종 농기계와 마주쳐 아슬아슬한 추월도 불사하니 버스 안 노인 승객은 각자도생하듯 손잡이를 꽉 잡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이런 마당에 상냥한 감정노동까지 바라는 건 나 같은 철딱서니나 할 뿐이다. 진안군의 지역독립언론 ‘광장’에 실린 농어촌버스기사들의 실태를 보니 10년을 기사로 근무해도 임금은 240만원, 식당도 없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운전을 하고 있다. 이런 처지에 친절이고 뭐고 버스가 다니기만 해도 감지덕지다.

농촌 인구는 줄어들고 승객이 드문 노선을 폐지하다 보니 교통 오지가 계속 늘어왔다. 그래서 오전부터 지자체는 버스회사에 보조금을 주고 노선 유지에 애를 써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철도 없고 자가용 이용도 어려운 농촌에서 고령의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버스는 여전히 중요한 이동 수단이건만, 농어촌버스는 움직일 이유보다 멈출 이유를 더 많이 찾아내곤 했다. 농촌주민의 이동권 제약이 심각해지자 ‘100원택시’와 같은 공공택시가 도입되고, 근래엔 ‘콜버스’라 하여 수요응답형 교통수단이 도입되는 노력도 있다. 하지만 무한정 이용이 아닌 바우처 시스템으로 용무가 있을 때 아껴서 쓰곤 한다. 자율주행 교통수단 도입도 연구 중이지만 노인들 생전에 타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농촌에서 버스는 이동 수단만이 아닌 지역생존의 보루다. 버스가 오고 가야 사람이 오고 미용실도 제과점도 살아남는다.

근래 경북 청송군이 전국 최초로 실시한 버스 완전 공영제를 눈여겨봐야 한다. 청송군의 주민들과 방문객 모두 무상으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깟 버스요금을 아끼려 설마 외출을 줄였을까 싶지만, 현금 쓰는 일을 세상 무서운 일로 여기는 농촌 노인들과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공공버스는 세상 구경 나갈 계기를 만든다. 대중교통은 수단이 아니라 보편권리다. 나라 사정 어려울 때 시장으로 넘겼던 것을 부자나라가 된 지금 시장에 맡겨둘 이유가 없다. 권리로서의 대중교통 완전공영제 실험이 저 멀리 농촌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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