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당분간 연봉 질문은 접기로 했다

이정구 기자 2023. 6. 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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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기업과 산업 현장을 취재하면서 처음에는 숫자에 놀랐다가 나중에는 둔감해지는 일이 잦다. 조(兆) 단위 투자나 매출은 경이로우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인 ‘숫자 이야기’는 유튜브에서 발견했다. 취업 정보 콘텐츠를 올리는 한 유튜브 채널은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직장인에게 “연봉 얼마 받으세요”라며 ‘현실 연봉’을 묻는다.

직장인들 모두 서로 궁금해하지만 쉽게 묻지 못하는 질문에, 뒷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은 직무·연차별 연봉을 솔직히 답해준다. 무기계약직으로 월급 200여 만원을 받는 박물관 연구원, 연봉 질문에 ‘성실신고대상(연 매출 5억원 이상)’이라고 우회적으로 답한 한의원 원장. 연봉에 만족, 불만족한다는 기자들도 각각 나온다.

영상을 본 사람들 반응도 제각각이다. “지방은 현실이 다르다. 지방 공단에서도 같은 인터뷰를 해달라” “성실신고라는 표현을 처음 알았다” 등. 물론 ‘궁금했던 내용인데 대신 물어봐 줘서 도움이 됐다’라는 반응이 가장 많다.

인터뷰 시리즈는 여의도, 안산 시화공단 등 여러 곳에서 이뤄졌다. 읍(邑)·리(里)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을 다니는 내 입장에서 영상과 댓글에 모두 공감이 갔다. 주변만 해도 여전히 농사를 짓는 이웃집, 주변 공단에 취업한 고교 친구, 대기업에 다니거나 창업한 대학 동문이 겪거나 바라보는 숫자는 다르다.

영상을 보고 난 뒤 어쩌다 조선(造船), 중공업 현장 출장이 잦았다. 도산 위기에 놓여 대형 크레인까지 고철 값에 팔았다가 기사회생한 중견 조선소, 탈원전 시기 원전 일감이 끊겨 휴업, 대규모 명예퇴직이 이어졌다가 다시 뛰는 원전 기업 등이었다. 지금은 쇠 깎고 철판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시 찾아온 일의 보람을 이야기했다. ‘연봉은 나아지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무급휴직도 견뎠는데 일감이 쌓였으니 나아지겠죠”라고 웃어 보였다. 아직 처우가 좋을 리 없었지만 조 단위 투자액 숫자에선 느끼지 못했던 산업 현장의 활력, 희망 같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출장에서 돌아온 뒤 주말에 독립 출판 행사에 갔는데 구석 테이블에 공장 작업복 차림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용접 일을 하며 사진도 찍고 글도 쓴다며 갱지에 투박하게 인쇄된 책을 소개했다. 제목은 ‘철의 숲(Iron Forest)’. ‘철(鐵)’을 주제로 한 동화로, 철의 숲 중앙에 철철 흐르는 강(강철)에서 태어난 철학(학), 철퍼덕(오리), 철렁이(지렁이), 철두철미(머리 둘 달린 동물)와 갓 태어나 엄마를 찾는 여행을 시작하며 이들에게 질문하는 ‘매미’가 등장한다.

아직 ‘철’없는 매미는 “위아래도 모른다” “철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이곳(철의 숲)을 이해 못 한다”는 핀잔을 듣지만, 포기하지 않고 ‘철탁써니(태양)’까지 찾아 질문을 이어간다.

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으며 매출, 영업이익, 연봉 같은 숫자 질문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지난날을 돌아보게 됐다. “10여 년에 걸쳐 개발한 이중 연료 엔진이 성과를 냈다” “녹이 슬까 봐 산화 방지 페인트를 칠해뒀던 원전 장비를 이제야 쓸 수 있게 돼 감회가 새롭다”며 벅찬 얼굴로 이야기하던 철없는, 철의 숲 사람들을 떠올리며 당분간 연봉 질문을 접어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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