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6월항쟁, 87년헌법, 대법관 인사권
현행 ‘87년헌법’을 탄생시킨 6월항쟁이 36주년을 맞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던 경찰 등 권력기관의 음모를 국민이 막아내고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킨 게 6월항쟁이다. 그 와중에 경찰의 최루탄에 청년 이한열이 희생됐다. 청년들의 귀한 목숨이 국가폭력에 스러지고서야 민주주의가 꽃핀 것이다. 그 소중한 결실이 87년헌법이다.
87년헌법 아래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선도국가가 됐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이룩한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이 한류 열풍 못지않게 높다. 그러나 다시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민주주의 위기론의 먹구름이 한반도 남단에 드리우고 있다. 권력기관의 폭력으로 얼룩진 ‘법치 없는 권력만능 시대’의 악몽이 법치를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킨 ‘민주 없는 법치만능의 시대’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87년헌법은 6월항쟁의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온전히 해석될 수 없다. 무엇보다 6월항쟁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구현한 80년헌법에 따라 독재정권을 연장하려는 호헌 시도를 저지한 국민의 직접 행동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아울러 ‘제왕적 대통령제’를 ‘민주공화적 대통령제’로 전환하기 위한 기본과제로 대통령을 국민직선제로 개혁한 것임을 잊어서도 안 된다.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 위기가 반복되는 것은 바로 국민을 중심에 두는 87년헌법의 기본정신이 정치현실에서 무시되거나 소홀히 돼 온 탓이 크다. 무엇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해 대통령제를 합리적으로 정상화하여 한국형 대통령제로 구성한 헌법적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 87년헌법의 대통령제를 미국식 대통령제나 권위주의 시대의 독재적 대통령제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형 대통령제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1인 기관인 대통령에게 행정권을 전속시킨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반을 대통령으로 삼기는 하지만 대통령 외에도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국무회의, 행정 각부 등으로 구성되는 집단적 권력체인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제청권이나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 대한 부서권을 가지는 것도 특징이다. 집단적 행정권의 구도에다가 2인자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만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은 ‘의회와의 협치를 전제로 한 분권형 대통령제’를 87년헌법이 추구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87년헌법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추구하고 있는 또 다른 근거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법관 인사권이다. 조재연·박정화 대법관의 후임 인선을 위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절차가 마무리되면서 대법원장의 최종 제청이 곧 있을 모양이다. 그런데 제청이 되기도 전에 용산의 대통령실에서 특정 후보 불가론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어 문제다.
최고법원인 대법원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전형적인 비선출 권력이어서 민주적 정당성을 최소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선출권력인 대통령이나 국회의 관여가 불가피하다. 민주화 이전의 독재헌법은 그 역할을 대통령에게만 부여했다. 그러나 87년헌법은 한국 헌정사 최초로 국회의 동의를 대법관 임명의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의회와의 협치에 기초한 민주공화적 대통령제의 장치를 마련했다.
한편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이 또 다른 요건이어서 결국 대법관은 삼권이 모두 인사에 관여하는 구도라는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합의제 기관인 대법원의 본질에 어긋나게 대법원장이 과대대표되는 문제점 때문에 폐지론이 지속돼 왔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는 대통령과 국회 등 정치적 선출권력에 의해 독립성이 근간인 최고법원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버팀목이기도 하다는 긍정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60년헌법이 법관 자격자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한 선거제를 채택하거나 법관추천회의의 제청동의권을 인정한 62년헌법의 예에서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완전히 무력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명령을 헌정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삼권이 모두 관여하는 대법관 인사제도는 일방의 독주보다는 국민을 중심에 두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할 주체들의 협치를 주문한 것이다. 6월항쟁 36주년을 맞이하면서 또다시 87년헌법의 기본정신을 답답하게 되뇌는 현실이 마냥 서글프기만 하다. 무엇보다 국가폭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민주적이고 분권화된 권력에 의한 공화적 법치를 구현할 대법관의 인선이 6월항쟁에 기초한 헌법정신에 맞게 합리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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