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식사 맛있게 하세요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2023. 6.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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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씬한 몸 신봉하는 시대…5년새 식이장애 60% 급증
‘가짜 식욕’탓 폭식도 늘어…사회의 심리 결핍서 기인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요즘처럼 음식과 다이어트가 삶의 중심인 적이 있을까? 음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먹방과 쿡방을 즐기는 건 이미 낡은 풍경이다. 진료실에서 다이어트약 처방을 원하는 환자들이 부쩍 늘었다. 상담 시간에 10대 청소년은 ‘프로아나’로 활동하는 얘기를 자주 꺼낸다. 낯선 용어 프로아나가 요즘 SNS를 통해 확산되는데 프로아나란, 찬성한다는 뜻의 접두사인 프로(pro)와 거식증을 의미하는 아노렉시아(anorexia)가 합쳐진 말이다. 한 마디로 거식증을 선망하는 모임이다.

초창기 프로아나가 폐쇄적이었다면 요즘은 SNS로 쉽게 ‘함께 조일(굶으며 살을 뺄)’ 친구를 찾고 서로의 극단적 다이어트를 응원한다. 뼈말라 상태가 되기까지 먹고 토하는 방법을 서로 지지하며 소속감을 느낀다. 그들은 뼈가 보일 때까지 마른 상태를 동경하기 때문에 종종 치료를 거부한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모두 식이장애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날씬한 몸이 아니면 스스로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일상의 삶에서 음식과 다이어트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수록 식이장애에 가까워진다. 최근 5년 사이 식이장애를 겪는 사람이 약 60%가량 증가했고 생각보다 훨씬 우리 가까이에 있다. ‘몸’에 대한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압력으로 다가오는 사회에서 한국인 80% 이상이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음식을 먹는 건 다양한 심리적인 면이 반영된 사회적 행동이다. 우리가 흔히 ‘고향의 맛’ ‘어머니의 손맛’이란 표현을 쓰는데 음식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살아온 인생의 한 장면을 포착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우연히 마들렌을 먹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인상적인 이 대목을 심리학에선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른다. 반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음식에 나쁜 기억과 연관된 경험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가르시아 효과라고 부르는데,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걸린 후론 생선 요리를 싫어하고 특정 음식을 먹고 복통 같은 불쾌감을 경험한 후로는 그 음식을 기피하게 되는 현상이다.

기분과 식욕은 바늘과 실처럼 세트로 움직인다. 우울증을 진단하는 기분 증상에는 식욕이 포함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배부르면 먹기 싫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식욕인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짜 식욕’으로 폭식을 한다. 가령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화나고 속상한 여주인공이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부엌에 가서 밥과 남은 반찬들을 고추장에 비벼 꾸역꾸역 먹는다. 야식증후군으로 불리는 밤의 폭식 상당수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채워지지 않은 정서적인 허기를 음식으로 채우는 ‘가짜 식욕’이다.

상담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인사하던 청년이 떠오른다. 오전 9시에도, 배가 불러도, 오후 3시에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고 인사한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청년의 마음 한편은 여전히 중3 주변을 쓸쓸하게 배회하는 듯했다.

뼈아픈 후회, 청년은 마지막 인사도 없이 중학교 선생님과 헤어진 걸 지금까지 강박적으로 자책하고 있었다. 그림을 정성껏 가르쳐준 미술 선생님이라고 했다. 소년이 어른에게 받은 최초의 거룩한 환대였을 것이다.

중3 졸업식 날, 미술 선생님은 학교 마치고 교문 밖에서 잠시 보자고 하셨다. 소년은 선생님이 기다리던 장소와 일부러 다른 길로 귀가했고 그 길로 영영 이별이었다. 소년은 왜 선생님을 피한 것일까? 아마도 소년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남이 곧 이별을 직면하는 자리여서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이별 없이 헤어진 마음, 청년에게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인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조언은 부질없다. 그럴 결심이었다면 수십 번 찾아갔을 것이다. 청년은 굶어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배고픈 유년에 압정 박힌 것도 아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작별 인사를 진심을 담아 반복적으로 건네는 것이다. 3년을 한결같이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인사하던 청년은 끝내지 못한 애도의 과정을 필사적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폭식하거나 극단적으로 음식을 제한하거나, 식이장애가 현대에 대폭 증가한 건 우리 사회의 어떤 심리적인 결핍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지난주 강남에서 미국 3대 햄버거로 꼽히는 버거의 팝업행사가 열렸다. 오픈시간이 낮 11시인데 새벽 1시부터 대기하는 사람들의 행렬 사진을 신문에서 읽었다. 햄버거를 손으로 잡으면 체온과 거의 유사하다. 이상적인 햄버거는 뜨거운 게 아니라 엄마 품처럼 따스하고 빵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그들은 새벽부터 필사적으로 온기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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