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75) 창경궁 대온실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인 창경궁을 구경하다 보면, 옛 궁궐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을 만나게 된다. 궁궐 북쪽의 춘당지(春塘池)라는 연못 뒤에 서 있는 흰 유리 건물로, 1909년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이다. 식물을 키우는 공간이지만, 여기에는 얼룩진 역사가 숨겨져 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을 사실상 지배하기 시작한 일제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위에 올린 뒤, 순종의 거처를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다. 그리고 순종이 이사한 궁궐에서 “새로운 생활에 취미를 느끼도록” 창덕궁 동쪽인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근대 시설인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만들었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조선의 상징인 전통 궁궐을 파괴하고 일부 전각만을 남겨두었다. 그로 인해 창경궁은 조선의 왜소함과 일본의 거대한 근대문명을 대비해 보여주는 일제의 선전물이 되었다. 1909년에는 창경궁에 대한 일반인의 관람이 시작되었고, 1911년에는 ‘창경원(昌慶苑)’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를 심어 1924년쯤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신성한 조선의 궁궐이 일탈이 난무하는 놀이터로 바뀐 것이다.
나무와 쇠로 만든 흰 뼈대에 겉은 온통 유리로 덮은 10.5m 높이의 대온실 외관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색적이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서양에서 유행했던 수정궁(Crystal Palace)풍의 근대 건축을 연상시키지만, 지붕 장식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묘한 대조를 이룬다. 1920년대 기록에 따르면, 온실에는 거대한 파초와 야자, 커피, 고무 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매년 20만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1971년의 사진을 보면, 대온실 양쪽에 2동의 돔형 온실과 뒤쪽에 높은 굴뚝이 보이지만,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온실 입구 계단 옆을 지키는 나무도 키 작은 반송으로 바뀌었다. 대온실을 프랑스 회사가 시공한 때문인지, 온실 앞에는 분수를 갖춘 프랑스식 정원이 남아 있다. 대온실은 일제의 불순한 의도가 담긴 건축물이지만, 2004년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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