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2. 6월의 함성, 고난의 꽃이 핀다-기연옥 명창

김진형 입력 2023. 6. 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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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함성 그대로 겨레의 눈물 노래하다
의병장 후손 자부심 ‘의암대상’ 수상
의병아리랑 발굴·교육·앨범 제작까지
끊임없는 배움 열정 아리랑 역사 기록
춘천아리랑보존회 결성 전수관 개관
▲ 기연옥(사진 왼쪽) 명창과 의병아리랑보존회 공연 모습.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고, 6월 6일은 현충일이다. 6월은 선열들의 고결한 피가 이 땅에 스며들어 꽃을 피운 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땅에 스며든 고귀한 피의 꽃을 ‘무궁화’라 이름했고, 그것은 다시 온갖 시련을 이겨낸 ‘고난의 꽃인 아리랑’으로 다시 승화되었다. 오후 4시, 나는 동면 월곡리에 소재한 춘천의병아리랑 전수관을 찾아갔다. 전수관장 기연옥 명창이 반갑게 방문자를 맞았다.

올해 기연옥 명창은 의암기념관에서 ‘의암대상’을 수상했다. 수상은 남면 가정리 의병마을 류인석 기념관에서 있었다. 의병가는 기연옥 명창에겐 삶의 전부였다. 수상하는 날,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버지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우리 기씨 가문은 의병장 기우만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거나 술이 거나해지면 식구들에게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전라도에서 춘천 조교리로 이주한 기씨 일가는 북산면에 기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타령과 아리랑을 자주 부르곤 했다. 동네 어귀, 고갯마루, 논배미 두렁길, 상여가 나가는 길목 그 어디서고 아버지의 노랫소리는 들려왔다. 그 가락은 마을 구석구석을 감돌면서 전설이 되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한국인의 마음이었고, 아버지의 노래는 기연옥의 어린 가슴을 북처럼 두들겼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

조교리가 소양댐 건설로 수몰되자 춘천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8남매의 여섯째인 기연옥은 스물한 살 나이에 막일하는 노동자와 결혼했다. 두 자녀를 낳았다. 남편과 목욕탕 일도 했고, 구곡폭포 매표소 일도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 아파트 한 채를 샀다. 생활이 안정되자 스멀스멀 아버지의 목소리가 서른을 갓 넘긴 기연옥의 젊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아련한 울림이 메아리처럼 왔다. 1992년 어느 날, 소리를 하는 친구를 따라 전국 국악경연대회에 나갔다. 경험 삼아 출전한 것이 뜻밖에도 장려상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연옥은 소리꾼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기연옥은 본격적으로 경기민요를 배웠다. 그런데 기씨종친회에 참석하게 되면서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그곳에서 기씨 가문의 투쟁사를 듣게 되었다. 늘 아버지가 자부심으로 말해왔던 의병의 후손이 바로 기연옥 본인이었음을 그제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의병의 피가 흐르고 있어. 난 의병아리랑을 노래해야 해.”

의병아리랑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일은 크나큰 보람이었고 자부심이었다. 가정리 의암 류인석의 생애와 투쟁사, 그의 조카며느리인 윤희순 의사의 행적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공부하고 노래를 배우고 불렀다. 윤희순 의사가 손수 지은 의병가 노랫말을 아리랑 가락에 붙여 부를 때는 가슴이 벅차 목이 메었다. 일본군에 체포된 아들이 무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윤희순 의사는 아들을 부여안고 식음을 전폐한 채 열하루를 울었다. 그 뒤 윤희순 의사는 탈진한 나머지 애석하게도 아들 류돈상의 뒤를 따라 운명하고 말았다. 이 애통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기연옥은 아리랑 가락에 통곡의 울음을 실어서 노래하곤 했다.


- 유랑은 나의 길

민요 강사 자격을 취득한 기연옥은 강원도 산골 오지 초등학교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민요와 의병아리랑을 가르쳤다. 험난한 오지 마을은 깊었으나 아이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했다. 아이들을 만나면 왠지 저절로 신명이 났다. 하나도 고단한 줄 몰랐다. 2007년 기연옥은 의병가를 발굴하고 아리랑을 널리 보급한 공적으로 명창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기연옥은 아이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사실 자신은 초등학교만 나왔기에 배우지 못한 게 한이었다. 그래서 주간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만, 저녁엔 배우는 학생 신분으로 야간학교를 다녔다. 처음엔 창피하여 누가 볼까 몰래 다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되어 검정시험에 합격한 뒤 한림성심대 사회복지과에 진학했다. 늦은 배움은 재미있었다. 이왕 내친김에 졸업하자마자 곧 동해에 있는 한중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전통문화학을 전공했다.

기연옥은 태백산 준령을 아리랑 가락처럼 넘나들었다. 그때 보았던 태산준령의 준엄한 자태를 기연옥은 잊지 못했다. ‘소리의 꿈’은 태백의 맥처럼 꿈틀거렸고, 그것은 기연옥의 영혼에 깊이 자리했다. 마침내 춘천의병아리랑 전수관을 지을 터를 월송리 산기슭에다 마련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정말 그렇게 되었다.

“터만 마련하면 집은 언제든 지어진다.” 그렇게 기연옥의 결심은 자신을 다독이곤 했다. 2022년 드디어 춘천의병아리랑 전수관이 오랜 진통 끝에 개관되었다. 전수관은 기연옥 명창이 그동안 아끼고 모은, 소중한 사비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 춘천 의병 아리랑 보전회 공연 모습

-의병가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이다

기연옥 명창은 단순한 소리꾼이 아니다. 그니에겐 뚜렷한 목표 의식이 있다. 의병은 한국인의 피요 맥이요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병은 굽힘 없는 겨레의 함성과 의지가 되어야 함을, 기연옥 명창은 노래함으로써 의병아리랑의 참된 가치를 느꼈다. 그것이 청솔처럼 푸른 선구자의 기상임을 그니가 어찌 모르겠는가.

2012년 우리의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그해 말 기연옥 명창은 ‘춘천아리랑보존회’를 결성하였다. 이듬해 기연옥이 부른 ‘춘천의병아리랑’ 앨범(사진)이 나온 일은 춘천의병아리랑사에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앨범은 해외동포, 보훈단체, 공공기관, 개인 등에게 배포되었다.

‘역사적 기억의 전승, 의병아리랑’

기념 앨범의 제목은, 기연옥 명창이 기록한 그간의 행적과 의지가 뚜렷이 새겨진 제목이었다. 그것은 또한 의병장 기우만 고손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이기도 했다.

-기연옥이 써가는 아리랑 기록의 역사

기연옥은 오늘도 자신을 쓴다. 의병아리랑의 역사를.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기연옥 명창은 늘 바쁘다. 그 어디서곤 기연옥 명창을 부르기만 하면 달려간다. 양로원이든, 어린이집이든, 장애인복지관이든, 그 어디든. 봉사는 언제나 행복하다. 소외계층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임은 아버지의 노래가 기연옥의 숨결에 오롯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2006년부터 그동안 받아온 이십여 개의 큰 상을 여기에다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올해 수상한 ‘의암대상’은 그 어느 상보다도 기연옥 명창에겐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는 기연옥이 걸어온 길이 어떠했는지, 또 기연옥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곧 일본은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할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동해, 서해, 남해의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연옥의 의병아리랑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앨범 CD를 돌리니, 윤희순 의병아리랑의 한 대목이 기연옥 명창의 입에서 함성처럼 튀어나온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워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르랴

-‘역사적 기억의 전승’에서 발췌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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