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곤봉, 캡사이신, 부러진 팔

장현은 2023. 6. 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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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윤석열 정부 노조탄압]

지난달 31일 전남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한국노총 금속노련 김준영 사무처장을 경찰이 제압하고 있다. 경찰은 저항하는 김 사무처장을 길이 1m 플라스틱 진압봉으로 1분여간 내리쳤다. 한국노총 동영상 갈무리

장현은 | 노동교육팀 기자

‘집회 현장 행렬에 특이사항은 없는지, 현장을 잘 보여줄 만한 특별한 소품은 없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모든 말을 다 받아 치면 좋지만, 특히 기사에서 강조할 만한 당사자 발언들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

노동집회 취재에 나설 때마다 되뇌어보는 내용이다. 현장을 잘 보여주기 위한 마음의 준비들인데, 지난달 31일 양대 노총의 서울 도심 집회에 갈 때는 한가지가 더 필요했다. ‘캡사이신이 뿌려지는 사태가 온다면,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각오. 만약 충돌이 생긴다면 ‘자칫 나도 캡사이신을 맞을 수 있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집회 현장에 나서는 요즘이다.

곤봉, 캡사이신, 부러진 팔….

최근 한주 동안 쓴 기사에 등장한 단어들이다. 정책을 다루는 부서에 있는데도, 최근 부쩍 정책 용어보다는 이런 사건·사고성 용어들을 자주 접한다. 지난달 31일 오전 전남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 농성장에서 하청업체 포운 노동자들의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하던 김준영 한국노총 금속노련 사무처장이 경찰 곤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망루에서 끌려 내려왔다. 같은 날 오후 서울 도심에서 열린 금속노조 총파업 대회와 민주노총 총력투쟁 대회 현장에는 애초 예고한 강경대응 지침에 따라 캡사이신 분사기가 등장했다. 이날 저녁에는 경찰이 양회동 강원건설지부 지대장 시민분향소를 세우려던 건설노조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한명은 팔이 부러지고 3명이 연행됐다. 모두 하루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23일 윤석열 대통령이 불법 시위 엄정대응을 촉구한 뒤 불과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간 문제없이 진행되던 대법원 앞 노숙집회도 이제 경찰 강제해산명령 대상이 됐다.

최근 며칠 새 부러진 건 노동자의 팔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그간 쌓아온 노력이 부러지고 있다. 양 지대장의 죽음 이후 우리 사회 또 다른 ‘양회동들’을 취재하며 만난 배달 노동자는 ‘딸배와 노가다’ 시대로의 회귀를 언급했다.

“건설 노동자를 ‘노가다’라고 무시했다면, 우리는 ‘딸배’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노동자도 아닌 취급을 받던, 그런 인식 개선을 위해 노조(활동을) 해온 건데….”

홍창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배달플랫폼노조 위원장은 “정권의 노골적인 노동 혐오 이후, 기업이 적극적으로 대화 테이블에 앉지를 않는다”며 “다시 그 과거처럼 ‘배달하는 기계’로 돌아가지는 않을까”를 걱정했다. 그는 ‘9년간 동결됐던 기본 배달료를 인상하라’며 지난달 16일부터 서울 송파구 배달의민족 본사 앞에서 18일간 단식농성했지만 배달료 인상 합의는 무산됐다. 김정훈 배민분과장은 “협상 테이블에 앉던 기업들도 (정부가 강경 대응에 나선) ‘지금이 기회'라며 잇속을 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어지던 노정 대화 통로도 부러지는 중이다. 한국노총은 지난 7일 긴급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전면중단”을 선언했다. 한국노총이 사회적 대화 전면중단에 나선 것은 7년5개월 만의 일이다. 한국노총은 한국노총 출신인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그를 평한다면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은 사람,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해 어디서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김준영이 노동 현장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 그게 노동운동의 희망이다.”

꼭 10년 전인 2013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장이던 이정식 장관은 <동아일보> 칼럼에서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으로 김준영 사무처장을 이렇게 소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관이 “노동운동의 희망”이라던 김 사무처장은 2023년 경찰 곤봉에 머리가 깨진 채 구속됐고, 이 장관은 친정 족보에서 파일 상황에 놓였다. 노동 현장 여기저기에 있는 김준영들을 막기 위해 거리엔 곤봉과 캡사이신이 등장했다. ‘노동운동의 희망’이 구속된 자리에 ‘곤봉, 캡사이신, 부러진 팔’이 놓인 이 상황을 이 장관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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