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덟 할망이 그려낸 ‘나의 해방일지’ [세상읽기]
[세상읽기]
[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물질은 인자보다 내가 더 잘한다.”
86살 강희선 할머니가 말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김인자 할머니의 해녀 스케치를 보다 샐쭉대며 한 말이다. 그림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음속 또 다른 상자의 빗장이 풀린 걸까?’
제주 중산간 마을 선흘로 서울내기 그림선생 최소연이 들어오며 선흘 할망 여덟분의 그림 수업이 시작됐다. 1년 반이 지났다. 선생과 여덟 할망은 온종일 붙어 있기도 하며 선흘마을 동백 꽃송이만큼 수북이 정을 쌓아왔다. 할머니들의 맘고생 몸고생 사연들이 그림선생에게로 흘러들었다. 소 키우고 말 키우고 귤 거둬 팔고 자식 키우며, 숱한 죽음과 탄생의 사건을 건사해온 묵은 이야기였다. 그 속에 4·3에 돌아가신 가족들 이야기는 새어 나왔어도, 바닷속 이야기는 없었다. 그림선생도 물질은 바닷가 일이려니 여겼고, 한라산 기슭에선 이를 하대하는 분위기라는 말도 들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숨 참고 하는 일이라 그런 걸까? 김인자, 오가자(84), 강희선 할머니가 처녀 적에 물질했다고 터트린 과거지사는 일종의 커밍아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제주해녀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의 고단했던 그때’를 어르는 포옹의 시간 아니었을까?
그림선생과 할머니들은 요즘 미술관 순례를 하고 있다. 지난 3일에는 해녀박물관에서 스케치를 했다. 다음날, 채색을 하고 한줄 느낌을 적어 완성했다. 김인자 할머니는 무명을 ‘바늘질’해 입던 ‘소중이’라는 잠수복과 태왁(테왁)과 비창이라는 물질 도구를 그리고 <시렸주게 어렀주게>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사설을 달았다.
“17살에 해녀 소중이 입었다. 매역(미역) 조무랐다.”
육지 말로 옮기면 <시렸고 얼었다>는 제목이다. 육지에는 벚꽃이 필 계절이지만 바닷속은 몸이 얼어붙던 날들이다. 미역 한축을 나무 한그루처럼 땅에 붙은 미역귀까지 온전히 캐서 올라와야 제값을 받았다. 그 열일곱살 소녀의 서러운 몸을 녹이는 마음이 <시렸주게 어렀주게>가 그려지는 시간이었다.
2021년에 대안학교인 볍씨학교 미술선생으로 온 최소연은 학생들을 이끌고 마을로 나갔다. 할머니들 집 창고를 정리해드리며 50년 넘게 묵은 살림살이 속 제주의 삶을 흡수하는 수업을 했고, 마당에 이젤을 폈다. 선생은 마늘을 묶고 양파를 늘어놓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스케치북마다 목탄 자국이 채워졌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아침, 홍태옥(86) 할머니가 목탄이 나무를 태운 막대인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이 잘 아는 숯검댕이라니 만만했다. 손에 잡고 허공을 한번 가르고는 스케치북에 선을 긋는다. 할머니들의 해방 여정이 시작됐다.
할머니들은 선생의 안내에 따라 막 뽑아온 무를, 동백동산에서 주워 온 도토리를 그렸다. 참외, 브로콜리, 옥수수, 오이…. 모두 다 직접 키운 작물이다. 하지만, 매양 같은 질문을 놓지 않았다. ‘그걸 그려도 돼?’ 그림이란 화가가, 뭔가 대단한 걸 그려야 한다는 마음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선생은 단호했다. “할머니, 우리는 모두 그림 그리는 인류야. 4만년 전에도 동굴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어느 날 강희선 할머니가 선생에게 속삭였다. “팬티를 그려도 될까?” 선생은 반겼다. 그러자 할머니가 “할망 팬티인데…”라며 주춤거렸다. 선생의 응원을 반나절 받고 난 다음에야 세밀한 <인주 팬티>를 그려냈다. 그림을 완성한 강희선 할머니의 첫마디는 “속이 뻥 뚫렸다”는 탄성이었다. 그리고 실패하고, 또 그리는 사이 온갖 이야기가 헤집고 올라왔다. 곱씹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놓아주었는데, 응어리들이 씻겨 나갔다.
선생과 제자의 해방 여정은 강력했다. 마을 영농조합에서는 할머니들의 그림을 스티커로 만들어 선흘에서 나가는 귤 박스에 붙이겠다 하고 아이들은 할머니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자 했다. 엄마들은 도시락 사업을 열었고 그제는 할머니들의 작물 그림을 스티커로 붙이겠다며 전복 미역 그림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림을 그리며 내 안을 정리하고 펼쳐 보여 남의 마음도 풀어주다 보니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고나 할까?
할머니들의 그림 수업 여정은 ‘너도나도 해방 찾기 사용설명서’와 같다. 빈 종이 한장과 연필 한자루면 충분하다. 그림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다. 숨을 틔우는 마음 해방구로 가는 길이다. 그 길에서 웅크린 아이가 고개 들어 눈을 맞춘다면 팔 벌려 안아주면 된다.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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