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잇따른 ‘장애인 차별 금지’ 판결…장애인 인권 인식 바뀌나

홍인석 기자 2023. 6. 8. 17:1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서비스 개선 손 들어준 법원
위자료와 손해 배상 청구하기엔 법 체계 미흡
“구체적 기준 無” 비판도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왼쪽)과 이삼희 한국디지털접근성진흥원 원장이 8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온라인 쇼핑 차별' 소송 선고 결과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뉴스1

시각장애인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 충분한 정보를 제공 받지 못해 차별을 겪고 있다며 온라인 쇼핑몰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법원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입각해 쇼핑몰 사업자들의 장애인 보호 및 권익 개선 의무를 인정한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서비스 개선 필요성을 인정한 이번 판결은 장애인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엔 이와 비슷한 판결이 잇따르는 추세다. 다만 차별 행위에 따른 장애인들의 위자료 청구는 계속 기각되고 있어, 법조계 일각에선 우리 재판부가 장애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장애인 서비스 개선 필요성 인정한 법원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16부(부장판사 김인겸)는 이날 시각장애인 임모씨 등 963명이 SSG닷컴·이베이코리아·롯데쇼핑을 상대로 각각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모두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1·2급 시각장애인인 원고들은 지난 2017년 9월 “온라인 쇼핑몰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정보 이용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며 SSG닷컴·지마켓·롯데쇼핑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청구 금액은 1인당 200만원이었다. 차별 행위로 입은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 명목이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해당 쇼핑몰들이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 행위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온라인 쇼핑몰에는 상품에 관한 필수 정보와 광고 내용 등이 이미지 파일로 업로드돼 있는데, 이 경우 시각장애인들이 스크린 리더(화면상의 글자를 읽어주는 프로그램)로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는 등 서비스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게 1·2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번 판결은 장애인에 대한 서비스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는 앞선 판례들과 궤를 같이 한다. 최근 몇 년간 장애인들은 버스 탑승이나 편의점 접근 등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호소하며 개선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해왔다.

지난 2018년 4월 거동이 불편한 신체 장애인 등 4명은 편의점·호텔·카페를 운영하는 기업들을 상대로 장애인 출입을 위한 경사로 등 편의 시설을 설치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초 호텔신라, 투썸플레이스는 강제조정을 수용했지만 GS리테일은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송으로 비화했다.

2022년 1심 재판부는 “판결 확정일부터 1년 안에 일부 매장에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접근로나 이동식 경사로를 갖추는 등 편의 시설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이어 “편의시설 설치와 관련된 통일적 영업표준을 마련하고 가맹점 사업자들에게 표준 지침에 따라 점포 환경을 개선하도록 권고하고, 개선 비용 중 20%를 부담하라”고 덧붙였다.

그보다 앞선 2015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역버스 탑승객이 버스 운수 업체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 일도 있었다. 휠체어를 탄 이 승객은 버스 내 공간이 협소해 휠체어로 방향을 전환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불편과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며 소송을 냈다. 법원은 버스에 전용 공간을 확보하고 정신적 고통 손해배상금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요청했다. 교통약자법 시행규칙에 따라 버스에는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길이 1.3m, 폭 0.75m 이상의 전용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 버스에는 그런 공간이 마련돼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1심에선 원고 패소 판결이 나왔지만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탑승 시간 내내 원고가 상당한 모멸감, 불쾌감을 느낄 수 있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입법 취지에 반한다”며 버스 내 전용 공간을 확보하고 원고에게 3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 “장애인 권리 개선 책임 좁아 위자료 청구까진 어려워”

다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장애인 차별에 대한 위자료나 손해 배상까지 인정하기엔 현행 법 체계가 미흡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이날 항소심에서는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온라인 쇼핑몰들의 위자료 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임씨 등 원고 963명에게 10만원씩 합계 3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이는 2심에서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의 고의나 과실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고, 피고가 행정기관으로부터 차별 행위를 이유로 시정 명령 등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차별금지법 및 그 시행령에는 ‘접근성 보장된 웹사이트’를 제공하라고 규정돼있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기준에 대해서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2015년 경기도 광역버스 탑승객의 소송 건도 마찬가지였다. 2심에서는 위자료 30만원을 청구하라고 판결했지만 대법원에서는 이 부분이 파기됐다.

양태정 법무법인 광야 변호사는 “국가가 장애인을 보호하고 권익을 개선해야 한다는 추상적 의무는 인정하고 있지만, 기업은 장애인 권리 개선 책임을 국가보다 좁게 보고 있고,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서 위자료나 손해배상까지 나아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