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실 곳은 책방, 책방입니다"…바쁜 일상이 잠시 멈추는 정류장

구은서 2023. 6. 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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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머무는 집
대전 동네책방 '정류장'
왁자지껄 초등학생부터
작가들도 잠시 머물러
이웃들의 사랑 받는 공간
동네책방 주인 되어보는
일일 책방지기 프로그램
"책 못 팔아도 괜찮아요"


“뉴진스의 하입 보이(Hype Boy)요!”

오후 4시, 책가방 메고 책방을 찾아든 초등학생 손님들에게 ‘듣고 싶은 노래가 있느냐’고 묻자 요즘 제일 인기 많은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외쳤어요.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하입 보이’를 검색해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잔잔한 인디음악을 틀어뒀던 스피커에서 전자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어요.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노래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튼 덕에 요새 초등학생들 사이에 인기 있는 그림책이 <푸른 사자 와니니>라는 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책방이 익숙한 듯한 아이들은 책장 구석에서 보드게임을 꺼내 한바탕 놀다가 “다음에 또 올게요!” 하고 사라졌어요.

지난달 대전의 동네책방 ‘정류장’에서 ‘일일 책방지기’ 체험을 한 날의 장면입니다. 오후 2시부터 6시간 동안 홀로 책방을 운영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2만원을 내면 ‘이다음에 조그만 책방 하나 열고 싶다’는 로망을 펼칠 수 있어요. 게다가 체험이 끝나면 ‘진짜’ 책방 주인이 찾아와 책 한 권을 선물로 줍니다. 목~일요일 하루에 한 명씩 네이버 예약 서비스를 통해 신청할 수 있습니다. 오민지 대표는 “홀로 책방을 운영하는데 외부 일정으로 책방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돼 고민 끝에 찾아낸 방법”이라고 했어요.


체험을 시작하는 오후 2시, 책방 앞에 섰을 때는 자못 비장했답니다. ‘손님이 한꺼번에 몰리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운동화 끈도 한번 조이고요. 전화 통화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뒤 책방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컴퓨터 전원을 켰습니다. 바탕화면에 있는 ‘일일 책방지기 매뉴얼’ 파일을 꼼꼼히 읽은 뒤 포스기 전원을 눌렀어요. 책방 문을 활짝 열어 환기하고, 문에 걸린 나무 팻말을 ‘Open(열림)’ 상태로 뒤집었습니다.

책방지기 매뉴얼에 적힌 ‘오늘의 할 일’ 1번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보세요’. 좋아하는 가수 허회경의 노래를 재생목록에 가득 담아뒀습니다.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오 대표 부탁대로 택배상자를 뜯어서 새로 배송된 책도 꺼내뒀고요.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쳤다’는 내용을 적어 책방 사진과 함께 오 대표에게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곧이어 진짜 주인장이 제 글과 사진을 소셜미디어 책방 계정에 올렸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완벽했죠. 손님이 보고 싶다는 것만 빼면.

오후 3시 반쯤 첫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제가 오늘 일일 책방지기 체험 중인데, 첫 손님이세요.” 반가움에 말을 막 쏟아냈는데 손님의 눈동자가 갑자기 마구 흔들립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저는 미리 주문해둔 책 가져가려고 온 건데요…”라고 했어요. 뒤이어 찾아온 초등학생 손님들까지 떠난 뒤로 책방은 내내 평화로웠습니다.

오후 5시. 하루 종일 바코드 한 번을 못 찍어봤어요. 평소에는 어떤 이들이 이곳을 찾을까 궁금하던 차에 책장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책장 곳곳에는 손님과 역대 일일 책방지기가 남기고 간 책 추천사가 붙어 있었거든요. <살려고 서점에 갑니다>라는 책에는 저자인 이한솔 작가의 이런 쪽지가 편지처럼 적혀 있었습니다. “책방 정류장이 저를 살립니다. 우리가 만나는 기적이 일상이 되기를….” 책을 사는(buy) 공간을 넘어 나를 살게(live) 하는 공간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책방은 용전초등학교 앞에 자리 잡고 있어요. 오가며 들르는 학생들을 위해 준비해둔 보드게임, ‘한 시절, 이곳은 저의 정류장이 되어주었습니다’라는 한 책방지기의 쪽지…. 책방을 둘러보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이곳은 이웃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란 사실을요.

일일 체험을 마칠 때쯤 오 대표가 책방에 들어섰습니다. “죄송해요. 오늘 한 권도 못 팔았어요.” 제 고백에 오 대표는 “그런 날이 많아요. 괜찮아요”라며 웃었습니다.

사실 일일 책방지기가 체험하는 건 책방 업무의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맨 처음 책방의 입지를 결정하는 것부터 인테리어를 하고, 이름을 정하고, 책을 주문하고, 배열하고, 추천하고, 북토크 등 새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까지. 책방 주인이 된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죠.

책방을 나서기 전, 오 대표는 제게 일일 책방지기 선물로 어떤 책을 가져가고 싶은지 물었어요. “사실 제가 책 담당 기자인데, 신문 지면에서 만나보기 힘들 것 같은 책을 좀 추천받고 싶어요.” 제 말에 한참 책장 앞에 서 있던 오 대표는 세 권의 책을 후보로 꺼내 들고 왔죠. 목정원의 산문집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신문사 기자인 구가인 작가가 쓴 에세이 <20세기 청춘>, 그리고 신문에는 제법 소개됐지만 누구에게든 책을 추천할 때면 늘 함께 고른다는 구로카와 쇼코의 <생일을 모르는 아이>.

책방에 있는 책들은 오 대표가 직접 읽고 골라온 책입니다. 대형서점보다 공간의 제약이 큰 동네서점은 그 자체로 큐레이션 기능을 합니다. 왜 이 책들을 아끼고 추천하고 싶은지 조곤조곤 설명하는 책방 주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얼른 책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결국 한 권은 선물 받고 나머지 두 권을 계산했어요.

책방을 나오며 깨달았습니다. 역시 하루 만에 책방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동네책방을 완성하는 건 ‘책 큐레이터’ 주인장이라는 것을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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