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한국 의료에서 벌어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김명지 기자 2023. 6. 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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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지 기자

”대한의사협회 지도부를 보면 마치 민주노총을 보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노동계 출신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이 한 말이다. 이날 함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의협이 의료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는 말도 나왔다. 의협은 의대정원 확대, 간호법 제정안, 의료인 면허박탈법 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파업과 단식 투쟁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왔다.

의협은 개원의 중심으로 모인 단체다. 진료 과목에 따라, 병원이 위치한 지역에 따라 여러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 의견을 한 데 모으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타협이나 중재안보다는 가장 강경한 안을 택하게 된다. 민노총에서 목소리가 큰 강성 노조가 득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잃을 게 없는 것처럼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거리로 나간다. 그래야 더 많은 것을 얻어낸다.

하지만 의사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일반 노동자와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는 선망의 대상이다. 수능 성적 순으로 전국의 모든 의대를 다 채운 후에야 공대의 정원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서울 강남 학원가에는 ‘초등학생 의대 준비반’이 나왔고 의사가 되려고 일본헝가리 의대 유학반까지 생겼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인 조민씨가 위조한 표창장으로 입학한 곳도 의대였다. 객관적 처우도 박하지 않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의사 평균 연봉은 2억 3000만 원이 넘는다.

그런데 한국 의료계에선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21세기에 벌어진다. 한 밤 사고를 당한 노인과 어린이들이 의사를 찾지 못해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한다. 지방 의료원은 연봉 3억∼4억 원에도 의사를 못 구해 애를 먹는다. ‘빅5′ 병원 간호사가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한다.

동창 모임에서 나오는 ‘친한 의사 한 명은 있어야 객사를 안당한다’는 말은 현실이 됐다. 의사들의 소아청소년과 기피로 문 닫는 소아과가 늘면서 병원이 문을 열기도 전에 장사진이 생기는 ‘소아과 오픈런’은 일상이 됐다. 국내 1호 어린이병원인 서울 소화병원은 최근 휴일 진료를 중단했다. 이 와중에 간호법 제정 무산에 반발한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에 불법진료를 강요하는 병원 359곳을 고발하겠다고 예고했다.

한국의 병원에서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모두가 서로 시기하고, 서로 증오한다. 의사와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은 서로 돕는 대신 증오의 폭언을 퍼붓는다. 시민단체도 예외는 아니다.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에 가도 돈벌이가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의대 정원을 늘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야 힘들고 돈이 안 돼 기피하는 필수의료에까지 인력이 흘러갈 것이란 주장이다. ‘밥벌이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얼마나 폭력적인가.

한국 병원 시스템 붕괴의 시작은 ‘국민 건강 보험의 역설’에 있다. 서울 유명 대학병원에서 흉부외과 전문의를 취득한 의사가 사표를 냈는데, 나중에 봤더니 대형 성형외과에 ‘쁘띠 성형’ 수련을 받고 있더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체외산소공급(ECMO)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위해 주말 밤낮없이 응급실을 지키는 대학병원 교수 연봉은 많아야 2억 원 언저리다. 서울 시내 ‘쁘띠 성형’ 의사의 연봉은 10억 원을 넘는다. 환자가 사망하거나 잘못될 경우 뒤따를 책임 부담도 없다. 비급여와 급여의 차이다.

정부가 350~500명 증원을 카드로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의사단체는 다시 단체 행동을 예고했다.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지 그 방법에 대해선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해선 안 된다. 정치권이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 정의롭고 상대방은 악(惡)이라는 위선에서 출발한 행동은 결국 자기 파괴만 일으킨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의술에 내는 비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오랜 수련이 필요한 일,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일, 그리고 사회적 가치가 더 큰 일이라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게 상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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