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가 된 전직 대통령, 이번엔 ‘노동’이다

임지영 기자 2023. 6. 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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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미셸 오바마 부부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바로 그것〉이 공개되었다. 두 사람이 설립한 제작사 ‘하이어 그라운드’가 만든 작품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다큐멘터리 <일>에서 총괄프로듀서를 맡았다. ⓒ넷플릭스 제공

미국 뉴욕 태생의 스터즈 터클은 1952년부터 40여 년간 자신의 이름과 같은 제목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구술사를 바탕으로 미국 민중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온 그는 1974년 역작을 남겼다. 제목은 〈일〉, 부제는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이다. 농부, 광부, 전화교환원, 청소부, 경찰, 자동차산업 노동자, 운동가, 운동선수 등 133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각자의 일터에서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는지,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기울인, 당시로서는 낯선 기획이었다.

대학생이던 버락 오바마도 이 책을 읽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던 시점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이후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거쳤다. 책이 출간된 지 50년이 지났고, 노동환경은 바뀌었다.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의 구조를 바꿔가고 있고 원격근무도 일상화되었다. 노동자 개인으로서는 본인이 어느 위치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오바마는 스터즈의 프로젝트를 재개하기로 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다.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 부부가 제작에 참여하고 출연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일: 우리가 온종일 하는 바로 그것〉(〈일〉)이 5월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이 4부작 시리즈는 두 사람이 2018년 설립한 제작사 ‘하이어 그라운드’의 작품이기도 하다.

1화는 서비스 직종 종사자에 관한 얘기다. “안녕하세요, 하우스키핑입니다.” 안에 사람이 있든 없든 항상 객실 앞에서 벨을 누른 뒤 이 말을 하고 문을 여는 엘바는 22년 동안 뉴욕시의 한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해왔다. 미시시피에 사는 젊은 싱글맘 랜디는 갓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한 참이다. 피츠버그의 배달원 카르맨은 ‘우버 이츠’를 통해 음식을 배달하며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꿈을 키운다. 〈일〉은 이렇게 미국의 세 지역, 세 가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뉴욕시 호텔, 미시시피의 요양보호 서비스 업체, 피츠버그의 자율운행 기술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각 업체의 말단에서 시작해 중간관리자, 지식노동자, 임원을 차례로 좇는다. 건물 동선으로 치면 출입구에서 시작해 회장 집무실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초반 오바마는 내레이션을 통해 오늘날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저임금 서비스 직종에 종사한다고 설명한다. “저숙련 일자리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서비스 직종의 일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이지만 힘들고 의료보험이나 연금이 없으며 급여가 낮다는 걸 상기시킨다. 랜디가 바라는 건 간단하다. 냉장고가 꽉 차 있고 공과금을 잘 내며, 현관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 그를 직접 만난 오바마가 그걸 이루는 게 이전 세대보다 어렵다고 느끼는지 묻는다. 마트 진열대에서 시리얼을 집어든 랜디는 본인이 1시간에 10달러를 버는데 시리얼 한 통이 6.15달러라고 답한다. 양육과 양립이 어려워서 요양보호사 일은 그만둔다.

노동환경은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을까.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로 게일 에번스가 등장한다. 그는 1980년대 코닥에서 청소부로 일했다. 청소부가 정규직이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며 연간 4주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때도 드문 사례였지만 그는 청소부에서 시작해 코닥 최고 기술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오늘날의 청소부는 하청업체에 고용되어 최저임금을 받고 아무도 없는 시간에 근무하기 때문에 다른 직원과 마주칠 수 없어서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을 비롯해 여러 다른 나라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2화에 등장하는 중간관리자는 중산층을 상징한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한때 미국 대중문화에서 부자를 괴짜로 묘사한 시기가 있었다. 1980년대, 모든 게 변했다. 중요한 건 돈뿐이라는 풍조가 생겨나면서 눈앞에서 중산층이 사라지고 영화 속 중산층의 직업은 죄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실제 중산층의 직업은 어떨까. 〈일〉에서는 호텔의 전화교환원, 스타트업의 데이터 매니저, 요양보호 서비스 업체의 감독관으로 묘사된다. 사는 위치나 경제학자에 따라 연봉 3만~23만 달러 중산층으로 구분된다. 벌이뿐 아니라 삶의 방식도 따라줘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예전보다 집을 장만하는 게 어려워진 현실을 통해 중산층이 줄어든 과정을 설명한다. 달라진 지형과 사회정치적 맥락을 짚지만 모든 직업이 처한 상황을 동일선상에 놓지는 않는다. 노조가 조직된 호텔의 노동자들은 비대면 서비스가 확산되는 업계 분위기 속에서도 고용 안정을 확신하고 비교적 낙관적인 직장 문화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일은 우리를 연결해주는 것 중 하나다”

중간관리자와 임원 사이에 있는 지식노동자도 있다. 호텔의 총지배인, 스타트업 엔지니어, 로비스트 등이 그렇다. 정식 직함이 ‘시니어 로보틱스 엔지니어’인 인도계 미국인 카르틱은 묻는다. “먹고살 정도가 되면 다음은 뭔가? 만족감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은 무엇이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 회사와 사회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지 생각한다.

오바마가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 이를 때쯤, 이 프로젝트의 야심이 단지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을 조망하는 데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오바마는 엘바가 일하는 호텔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으로 향한다. 호텔의 소유주인 다국적기업 타타그룹의 찬드라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인턴으로 시작해 CEO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자신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가 사회 양극화에 대해 걱정하지 않느냐고 오바마에게 묻자 그는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답한다. 이어 오바마는 내레이션을 통해 말한다. “우리는 깊이 생각 안 하지만 개개인은 무언가의 일부다. 일은 우리를 연결해주는 것 중 하나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존중받고 모두의 공헌이 인정받으며 모두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급여를 받으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서로의 신뢰가 강화된다.”

〈일〉은 2020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아메리칸 팩토리〉의 속편 격이기도 하다. 〈아메리칸 팩토리〉는 중국 기업 푸야오가 인수한 옛 제너럴모터스 공장의 국적이 다른 노동자 간 충돌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역시 하이어 그라운드가 만들었다. 노동의 구체적인 현장을 담은 작품이다. 미셸 오바마는 자서전과 강연에서 블루칼라였던 아버지에 대해 자주 언급해왔다. 하이어 그라운드는 이 밖에도 환경(〈우리의 위대한 국립공원〉), 아동 건강(〈와플+모찌〉), 미셸 오바마 자서전(〈비커밍〉), 정부 시스템(〈애덤 코노버: 정부가 왜 이래〉, 장애인 운동(〈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뤄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도 준비 중이다.

“우리에게 아직 어느 정도는 영향력이 있지?” 오바마 부부는 〈아메리칸 팩토리〉 비하인드 영상에서 말한다. 2018년, 은퇴한 대통령 부부의 다음 행보가 콘텐츠 제작이라는 사실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최근 주간지 〈버라이어티〉는 “더 이상 백악관에 있지 않을 때 오바마 부부가 다음 세대를 위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소프트 파워’를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스토리텔링이다. 실제로 〈일〉에서 ‘평안하냐’는 질문을 받은 오바마는 ‘꽤 그렇지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걱정된다’고 말한다. 하이어 그라운드를 만들 당시 미셸 오바마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우리를 고무시키고, 주변을 다르게 보게 하고, 마음과 마음을 열어준다”라고 말했다.

〈일〉은 두 사람이 내레이션이나 출연을 넘어 총괄프로듀서로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이 다큐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시의적절한 점검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기업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일갈한다. “정신이 멀쩡한 CEO라면 자신이 좋은 이미지로 비춰질 거라는 확신이 없을 경우, 촬영팀을 사무실로 초대할까?” 불합리한 노동시장의 구조까지 세심하게 조명한 건 아니지만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준비한다는 요즘 시대, '우리가 온종일 하는 바로 그것'에 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숙고하게 만든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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