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9. "길손은 묵어 가소서" 대관령 고갯길에 불망비로 거듭난 애민(愛民)의 덕

최동열 입력 2023. 6. 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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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령 옛길 반정(半程) 표지석. 멀리 강릉시내와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고갯길의 상징-대관령
‘산의 장막’, 백두대간을 넘는 가장 큰 교통로

우리나라 산은 대체로 안전하다. 등산객들을 위협하는 맹수가 거의 없고, 어느 산을 가든 등산로도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

그런데 시계추를 100년만 뒤로 돌려도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이따금 야생의 맹수가 출몰하고, 산을 넘는 길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산을 넘어야 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뤄진 지형 여건상 산을 넘지 않고는 교통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줄기에서 가장 낮은 곳을 골라 고개를 만들고, 령(嶺)·재·치(峙)·현(峴) 등의 이름을 붙이며 통행로로 삼았다.

강원도. 그중에서도 동해안은 특히 그러하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에 가로막힌 지형 특성상 보통 1000m 이상의 고산준령을 넘지 않으면 영서 내륙지역이나 수도권과 교류를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대관령, 진부령, 한계령, 진고개, 백봉령, 삽당령, 댓재 등의 고갯길이 백두대간 요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 대관령 옛길의 봄 풍경. 계곡물과 녹음, 솔향이 가득한 등산 명소이다.

대관령(大關嶺)은 가장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강릉과 평창을 연결하는 대관령은 이름 그대로 동해안에서는 가장 큰 관문이다. 영남대로에 조령, 즉 문경새재가 있다면, 관동대로에는 대령, 즉 대관령이 있으니 우리나라 고갯길의 상징 같은 아우라를 뽐내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동지역은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해발 1708m)을 필두로 남쪽의 동해·삼척 두타산(1353m)에 이르기까지 평균 1300∼1500m급 험산준령이 ‘산의 장막’을 치고 늘어선 곳이다. 내륙 지방에서 볼 때는 ‘육지 속의 섬’ 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곳에서 오직 대관령이 해발 832m, 가장 낮은 고개를 만들었으니, 이 고갯길이 없었다면 영동지역민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일은 훨씬 더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해발 832m라고 해도 해수면에 잇닿은 동해안, 영동지역에서 보자면 거대한 성벽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운 높이다. 그래서 강릉에 관향(貫鄕)을 두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은 조도(鳥道), 즉 하늘을 나는 새나 넘나드는 길이라고 했고, 교산 허균은 ‘벼랑에 선반처럼 걸린 길’이라며 잔도(棧道)라고 표현했다. 이따금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도 출몰하고, 겨울철에는 살을 에는 엄동의 한파 때문에 고갯길을 넘는 길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관 이병화 유혜 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
대관령 반정에 여각을 세운 강릉 향리
애민의 은덕을 기리는 비석
스토리와 함께하는 산행의 감흥

▲ 대관령 옛길 반정 즈음의 숲길에 서 있는 불망비 전경. 대관령에 산객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여각을 만든 기관 이병화의 덕을 기리는 소박한 비석이다.

오늘은 흔히 아흔아홉 굽이로 불리는 그 대관령 옛길 중턱에 서 있는 작은 비석 얘기를 해보려 한다. 대관령 정상의 절반 지점인 ‘반정(半程)’에서 300여m 아래 등산로 숲길에서 만날 수 있다. 1m 남짓 크기에 비석 윗부분에 갓을 씌우고 주변의 잔돌을 모아 나지막하게 담을 둘렀다. 옛길 등산로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워낙 소박하고 아담하게 세워진 비석인지라 존재 자체를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더 많다. 그냥 흔한 무덤 앞의 묘비 정도로 인식하기에 십상이지만, 비석이 전하는 뜻은 오늘날 그 어떤 웅변보다 우렁차다.

비석의 이름은 기관 이병화 유혜 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 한자 뜻 그대로 이병화라는 옛 관리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이다. ‘기관(記官)’이라는 관직명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강릉 관아에서 기록하는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비석이 세워진 때는 1824년 9월(음력)이다. 지금부터 199년 전인 조선 순조 임금 때다. 강릉지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병화라는 향리(鄕吏)의 은혜를 잊지 말자는 불망비가 대관령 옛길에 세워진 연유는 비석 앞면에 적힌 명문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 이병화 유혜불망비의 앞면. 비석을 세운 사연이 적혀 있다.

‘많은 돈으로 식리하여 은혜롭게 이곳에 점막을 지었네/ 이것을 운영하여 자본을 증식하니 농사를 짓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구나/ 오가는 길손은 휴식할 곳을 얻었고, 머무는 자는 숙소를 마련하게 되니/ 조각돌에 아름다운 행적을 새겨 명예로움을 오래 기리고자 하노라.’

이병화라는 이름의 강릉 향리가 대관령을 넘나드는 길손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거액의 사재를 들여 대관령 옛길의 반정에 길손들이 안전하게 머물고 갈 수 있는 여각을 지었고, 주민들은 그 고마움을 후세에 이르기까지 잊지 않기 위해 고갯길 한켠에 불망비를 세웠다는 아름답고 정겨운 내용이다.

이규대 강릉원주대 교수는 저서 ‘강릉지방 생활문화사 이야기’ 책(2016년, 해람기획)에서 “당시 향리층이 모두가 중인 신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병화 또한 중인 신분이었을 것이고, 양반사회의 공론이나 관비(官費)의 도움 없이 사재를 털어 일을 성사시킨 것으로 보인다”며 “19세기 중반 사회경제 전반의 역동적 변화상에 힘입어 보부상, 소상인, 서민층 등 대관령 옛길을 넘나드는 사람이 한층 많아지고 여각의 개설이 더욱 절실한 현안이 되었을 때, 사재를 쾌척하였다면 그 취지는 옛길의 험난함을 극복하여 불특정 다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계층 간 갈등이 날로 심화하는 현세에 전하는 애민(愛民)과 휼민(恤民)의 메시지가 더 감동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불망비의 뒷면. 비석을 세운 연도와 날짜가 새겨져 있다.

사실 등산의 또 다른 즐거움은 이야기를 챙기는 것이다. 유난히 산이 많은 나라이다 보니 우리나라 산에는 고갯길과 산마루에서부터 소(沼), 폭포, 낙락장송, 큰 바위 하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잉태되고 농익었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史實)에서부터 신화, 전설, 민담까지 산에는 온갖 스토리가 넘쳐 난다. 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 산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네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현장의 생생한 증언이고, 생활문화의 교본이다. 수백 년 전 이 산을 먼저 넘은 선인들이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하니 오늘 등산길에 오른다면 자연을 즐기는 것에 더해 꼭 그 산의 이야기를 챙겨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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