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피렌체에선 인간 뼈로 체스를 만들었다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6. 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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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숨겨진 뼈, 드러난 뼈’
로이 밀스 지음, 양병찬 옮김, 해나무 펴냄, 2만원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의 재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도 ‘뼈’일 것이다. 뼈의 역사는 수백만 년 시간을 넘나들고, 최고(最古)의 동물화석은 무려 ‘5억 살’에 달하기도 한다. 인간은 때로 불가사의했고 때로 경이로웠던 뼈를 섬기거나 장난감 삼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신간 ‘숨겨진 뼈, 드러난 뼈’는 미국 UCLA 교수이자 의사인 저자가 뼈를 통해 역사, 예술, 종교, 질병을 탐구한 책이다. 이를테면 ‘뼈 덕후’인 정형외과 의사가 써내려간 ‘뼈의 일생’이라 할 만하다.

중세 피렌체 외교관 엠브리아키가 뼈로 만든 장식함. 동물뼈에 형상을 넣어 만든 장식함은 현대 미술 경매에도 등장한다. [사진=출판사 해나무]
소뼈 브로커부터 본차이나까지... 5억년 ‘뼈’의 일생
고대의 뼈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 갈레노스는 뼈가 정자로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이유는 하얀 색깔 때문이었다. 1000년 뒤 페르시아 천문학자 아비센나는 ‘차갑고 건조하다’는 특성을 이유로 뼈의 성분을 흙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 뼈의 화학적 구성성분이 밝혀지기 전까지 뼈의 매커니즘을 밝히려는 시도는 인간 상상력을 추동했다.

고인류학자 도널드 조핸슨은 1970년대 “아와시 계곡은 인류의 기원과 관련된 유골의 보고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는 계곡이 위치한 에티오피아로 무작정 탐사를 떠났다. 1974년, 조핸슨은 320만년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보존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고대 여성의 뼈를 발견했다. 그 유명한 ‘루시(Lucy)’의 뼈다. 루시는 지금도 세계 모든 자연사박물관에서 복제된 모습으로 수백만 년을 건너 매일 현대인을 만난다.

숨겨진 뼈, 드러난 뼈
티베트에서 뼈는 부재의 흔적 그 이상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면 육신은 텅 빈 용기가 되므로, 다른 생물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은 독수리가 뼈의 살코기를 발라 먹으면 뼈를 망치로 부순 뒤 다른 곡물이나 우유와 섞어 작은 새들에게 먹였다. 인간의 넙다리뼈로 나팔을 만들거나 두개골을 맞대 장구 모양의 악기를 만든 것도 영혼과 소통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뼈는 중대한 주제였다. 신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었고(창세기 2장) 삼손은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였다(사사기 15장). 멕시코에선 3월에 열리는 ‘죽은 자의 날’ 축제에서 먼저 떠난 친지나 친구를 기억하곤 한다. 이 축제에서 사람들은 뼈로 몸을 치장하거나 뼈 모양 쿠기, 두개골 모양의 캔디를 즐긴다. 뼈는 거창하거나 심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여러 문화권에서 가볍게 소비되기도 했다.

중세 피렌체의 외교관 엠브리아키에게 뼈는 비즈니스였다. 그가 부린 공예가들은 동물 뼈에 형상을 새긴 장식함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 수준이 매우 정교했다. 엠브리아키의 뼈 장식함이나 뼈 체스판은 요즘에도 미술품 경매시장에 등장한다. 18세기 본차이나 제품은 오븐에서 고온에 구운 후 남은 뼈의 잔해인 골회를 도자기에 배합한 제조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본차이나 식기는 뛰어난 내구성으로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카우보이 시대 미국에선 ‘소뼈 줍기 산업’이 유행했다. 뼛가루가 섞인 토양에 씨를 뿌리면 농작물이 잘 자랐다. [사진=출판사 해나무]
카우보이 시대 미국에선 ‘소뼈 줍기 산업’이 활황이었다. 뼛가루가 섞인 토양에 씨를 뿌리면 농작물이 잘 자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뼈들은 가루가 되어 과인산 비료의 원료로 쓰였다. ‘소뼈 브로커’들이 철로 노선을 따라 마을마다 등장했고, 사람들은 사방에 너린 소뼈를 주워 불로소득을 올렸다. 탐욕은 결국 상상을 넘어섰는데 소뼈 줍기 경쟁이 격화되자 원주민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도 벌어졌다. 정작 원주민은 소를 신성시 여겨 뼈를 줍지 않았다. 어느 쪽이 야만에 더 가까웠는던 걸까.

죽음의 상징인 뼈는 아이들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단단하고 내구성이 놓았던 뼈는 인형, 회전목마, 썰매, 카약의 재료로 쓰였다. 민속 음악가들은 뼈를 악기로 삼았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바텀은 뼈 연주를 이야기한다. 19세기 화가 윌리엄 시드니 마운트도 ‘뼈 연주자’라는 그림을 남겼다.

골절을 의학적으로 본격 치료하기 시작한 건 20세기 초였다. 당시만 해도 정형외과 의사들은 모두 남자였다. 어긋난 엉덩관절을 바로잡고 단단한 뼈를 ‘망치질’하고 ‘톱질’하려면 육체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뼈가 부러졌을 때 왜 스스로 붙으며 치유되는지, 뢴트겐의 X선 사진이 의학계에 미친 의미가 무엇인지도 책에 설명이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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