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남·권기동 등 작가 5인 ‘빛을 모으는 자들’ 전으로 모였다

장재선 기자 2023. 6. 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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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당동 페이토갤러리에서 8일부터 한 달동안
권용래·김대신·이은경 등도 개성적 작품들 선보여

서울 신당동 페이토갤러리(PEYTO GALLERY)가 8일 개막한 전시의 제목이 눈길을 확 끈다. ‘빛을 모으는 자, 빛을 만드는 자(Gatherer of Light, Maker of Light)’. 성경 창세기에서 신이 빛을 창조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지난 2021년 12월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빛: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을 떠올리게도 한다. 테이트미술관 전의 중심이었던 ‘빛의 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 이후로 빛의 명암을 다루는 것은 현대미술의 큰 화두였다.

빛은 미술 작품에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분위기와 감정을 강조하며 공간과 형태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작가는 빛의 색상, 명암, 강도, 방향을 조절해 작품의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한다. 또 빛과 그림자를 조합하여 입체감과 주제를 강조해 작품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한다. 그러니 모름지기 작가는 빛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데, 이는 빛을 창조해 다스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부담을 지는 일이다.

이번 전시는 그런 압박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자신만의 미학을 만들어온 작가들의 작품 21점을 선보인다. 권기동, 권용래, 김대신, 이은경, 이창남. 모두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에서 공부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작가마다 빛을 관찰하고 창작에 활용하는 방법은 다르다.

우선 도시풍경을 소재로 한 권기동의 작품은 몽환적인 색채, 강렬한 빛, 흔들리며 소멸하는 듯한 형태와 윤곽선이 특징이다. 작가가 만났던 시공간을 가공된 듯한 낯선 풍경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특정 풍경의 구체적 재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실적이면서도 생경한 느낌을 자아낸다.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보기 위한 권기동만의 작법이다. 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창작을 지속하는 비밀을 헤아리게 해 주는 작품들이다.

권용래는 빛 자체를 하나의 재료이자 회화 기법으로 활용한다. 그 결과로 빛을 화면에 머금게 한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을 이용해 회화와 부조를 융합한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수십, 수백 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유닛을 망치질을 통해 평평한 표면을 구부러뜨리고 안료를 입힌 뒤, 캔버스 위 공간에 고정하고 조명을 비춤으로써 마치 윤슬과도 같은 빛의 물결을 창조해낸다. 그의 ‘Eternal Flame’ 시리즈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차갑고 단단한 물질에 다채로운 컬러의 빛을 더하는 신비를 보여준다.

김대신의 ‘paysage’ 연작은 다양한 형태와 색이 서로 섞이고 퍼지고 중첩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원로 작가들의 단색화 작업이 그렇듯 서양의 기(技)와 동양의 정(精)을 아우르며 자연이 보여주는 찰나를 자신만의 풍경으로 내놓는다. 그의 풍경은 산에서 경험한 현상을 심상에 투영해 캔버스에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 물감을 흩뿌리거나 흘려 겹치고 번지는 효과를 쌓아 여러 단계로 중첩해 만들어 낸 푸른 화면의 낯선 풍경이 독특한 미감을 자아낸다.

이은경의 인물화는 무표정한 여성들을 만나게 해 준다. 현실에서는 부딪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다. 충혈된 눈동자, 눈 및 멍울 자국, 굳게 다문 입술. 보고 있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시선을 돌릴 수 없다. 인간끼리 살 닿는 맛은 없고 뼈 부딪치는 소리만 달그럭거리는 현대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거울에 반영된 자화상을 그리고, 관객은 그 자화상을 자신으로 느끼며 몸에 돋는 소름을 만지게 된다. 작가는 서울대에서 공부하기 이전에 러시아 B.V 요한슨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아카데미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강렬한 질감의 화면은 이은경 그림의 매혹 중 하나이다.

도시 풍경이나 일상 속 정물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이창남 화백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을 한다. 자신만의 미학을 창출해내는 작업에서 장인 정신이 여실히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는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사물에 맺혀 만들어 내는 분위기와 색을 캔버스에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유화, 수채, 연필, 목탄 등을 재료로 섬세한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을 통해 대상의 미세한 시간의 변화와 흔적을 기록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대기의 투명도를 통해 계절과 일기의 상태가 사물에 일으키는 색의 변화를 그만의 시각적 직관을 통해 캔버스에 담아낸다. 일상의 사물이 수많은 순간들을 품어서 축적한 본질적 아름다움을 고찰하는 작업이다. 빛에 따른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던 인상파와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색을 쌓아 올려 형태를 강화한 폴 세잔과 닮아있다. 세계미술사 속의 걸작들과 한 판 겨루는 듯한 기세가 21세기 작가 이창남의 작품에 숨어 있다. 전시는 7월 8일까지.

한편 페이토갤러리는 지난 2021년 12월 개관해 10번째 전시를 열고 있다. 페이토(PEYTO)는 캐나다 밴프에 있는 호수 이름이다. 동음 이의어인 ‘Peitho’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설득의 여신이기도 하다. 갤러리 측은 “국내외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발굴하고 소개함으로써 우리 일상의 삶에 예술이 자연스럽게 스미게 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장재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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