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은 누가 만들었나…한국건축계가 맞닥뜨린 미스터리
한국미술사를 지켜온 드높고 든든한 성채인 미술관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5년 전인 1938년 윤 7월5일, 그러니까 일제에 조선왕조가 나라를 빼앗긴 지 딱 28년을 맞는 8월29일에 그 미술관은 태어났다. 간송 전형필(1904~1962)의 올곧은 의지와 정성으로 잉태된 미술관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될 위기에 처했던 서화와 도자기, 석물 등의 한민족 문화유산의 정수를 전 재산을 바쳐 사들이면서 지켜낸 대수장가였다. 서울 성북동 북한산 기슭의 언덕에서 온통 하얀빛의 미니멀한 2층짜리 건축물로 압제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중일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조선 민족의 정체성과 혼을 지키려는 노력은 불온한 책동으로 의심받던 시절이었다. ‘보화각’이란 이름 아래 민족미술의 진수를 오롯이 모은 모더니즘풍 예술전시관의 등장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2000년대 초반 숱한 전통 서화와 도자기 등의 명품 전시로 ‘국민전시회’의 반열에 올랐던 간송미술관의 역사는 이렇게 당대 서구의 첨단 건축사조를 반영한 세련된 건축물의 건립으로 시작된다. 일체의 군더더기 장식을 배제한 직사각형 평면의 본체와 진입부 부분 2층에 옆구리 창을 튀어나오게 한 조적조 콘크리트 미술관을 우리는 근대건축가 박길룡(1898~1943)의 역작으로 기억하고 있다. 건축사학계에서는 기존 서구의 고전주의 건축과도 다른 기하학적 형상의 모더니즘 양식을 민간 건물에 도입한 시도 자체를 획기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첨단의 건축 공간을, 32살 거부였던 간송이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대가들의 그림과 글씨, 도자기, 고서적들이 채우게 됐다. 그때 그 기쁨을 간송의 수집을 도왔던 당대 최고의 감식가 오세창(1864~1953)은 낙성식 때 올린 보화각 주춧돌에 이런 글귀들로 새겼다. ‘…한집에 모인 것들은 오래도록 빛날 보물 중 보물이로다… 세상 함께 보배로 삼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2023년 국내 건축동네에서는 과연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가 박길룡이 맞는지를 두고 새로운 논쟁이 일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간송미술관의 본체를 만든 건축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예사롭지 않은 양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
이론을 제기한 이는 영국에서 서양건축사를 전공하고 한국 근현대건축사에 대한 비판적 연구작업을 진행해온 소장학자 김현섭 고려대 교수다. 그는 올해 초 건축잡지 월간 <스페이스>(공간) 1월호에 낸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이 아니라면?’이란 기고 글을 통해 간송미술관 보화각을 박길룡이 설계한 구체적인 물증이 현재까지 드러나지 않고 박길룡 본인과 1960~80년대 그의 건축 이력을 연구한 후대 학자들 또한 보화각에 대해 어떤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보화각을 박길룡의 작품으로 간주한 근거가 된 최초의 출판물은 1967년 간행된 <공간> 6호(1967년 4월호)다. 김현섭 교수는 보화각의 건축사적 의미를 정리하기 위해 당시 6호에 게재된 특집 ‘건축가 박길룡: 24주기를 맞이하여’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독해하고 관련 자료들을 뒤져 보았다.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1960년대 보화각 전경 사진이 실린 것말고는 이 특집의 총론 격인 당대 대표적인 건축사학자 윤일주 전 성균관대 교수의 글이든, 박길룡과의 기억을 회고한 건축 관계자 10인의 추상록(追想錄)이든, 어디에도 보화각은 박길룡의 작품으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일주 교수가 1978년 출판한 <한국현대미술사(건축)>의 박길룡 작품 목록에 보화각은 빠져 있으며 그의 후학인 윤인석, 김정동 교수가 1980년대 이후 조사해 밝힌 박길룡의 건축사 이력에도 보화각은 거론되지 않았다. 더불어 1990년대 이후 간송미술관 역사를 언급할 때 정전처럼 인용되는 미술사학자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간송 평전’(1991)이나 ‘보화각 설립 이야기’(1998)에도 설계자 박길룡에 대한 언급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김현섭 교수는 주목했다.
특기할만한 건 1990년대 이후 보화각에 대한 논고를 쓴 송율과 송석기 등 소장 연구자들의 행보다. 이들은 1967년 <공간> 6호의 특집과, 당시 특집의 텍스트와 구체적인 연관성 없이 잡지 지면에 실린 보화각 게재 사진을 근거로 박길룡 작품설을 강조하면서 보화각이 이른바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초창기 국내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이라는 논지로 나아갔다. 특히 송율은 1993년 4월 <건축가>에 기고한 ‘미발표 한국 근대건축물’이란 글에서 최완수 소장의 글을 토대로 보화각이 간송미술관 건물임을 밝혔으며, 1967년 <공간> 6호에 박길룡 특집 텍스트와 같이 실린 보화각 사진을 근거 삼아 보화각 건축가는 박길룡이라는 사실상의 결론을 내린다. “보화각의 설계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공간 67년 4월호 박길룡 특집의 화보 중 북단장이라는 사진 제목으로 끼어 있는 보화각의 사진은 이 건물이 박길룡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게 한다.”(송율의 글 15쪽)
결국 보화각 건축가가 박길룡이라는 근거는 현재로서는 1967년 <공간> 6호에 실린 특집 기사의 모호한 보화각 사진 한 장뿐이며, 이 물증 혹은 미스터리에 바탕을 둔 1993년 송율의 글 이후 보화각의 건축가가 박길룡으로 굳어지게 됐다는 말이다. 국내 건축계가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명시한 것은 1993년 송율의 글이 처음이었다는게 김현섭 교수의 판단이다.
보화각이 박길룡의 작품임을 간송 쪽이 먼저 확인해준 것이 아니라 건축계의 인식을 따라 간송 쪽도 보화각의 건축가를 박길룡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박길룡 설계설이 2000년대 이래 문화계에 널리 확산되자 현재 컬렉션 전시와 활용사업을 하고 있는 간송미술문화재단도 누리집에 박길룡이 설계했다거나 간송이 설계를 의뢰했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거의 명확한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쪽으로 바뀐 셈이다. 김현섭 교수는 이를 두고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서의 보화각은 이제 간송 측에서도 빠트릴 수 없는 스토리가 됐다”고 짚었다.
김현섭 교수의 글이 학계에 알려지면서 파장이 일자 건축사가인 정인하 한양대 교수가 최근 나온 <스페이스>(공간) 6월호에 반박글을 실었다. 정인하 교수는 간송미술관이 건립된 1938년보다 1년여 앞선 1936년 12월 박길룡의 설계로 완공된 청운동 민병수씨 근대가옥의 사진과 평면 도면 등을 당시 일본 건설회사 시미즈구미가 발행한 <공사연감>(1937)과 <주택건축도집>(1939)에서 찾아내 공개하면서 간송미술관과 비교했다. 민병수씨 근대가옥 건물 1층 측면에 창문을 단 반원형 공간이 돌출된 모양새가, 건물 본체의 2층 측면에 반원형 공간이 돌출된 간송미술관의 외형과 매우 유사하다는 분석이었다. 그는 또, 당대 민간 건축주를 상대로 현대건축 언어를 구사할 국내 건축가들은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도 양식적인 유사성만으로도 박길룡의 작품이 맞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박길룡이 설계했다는 실제 물증이 없다는 김현섭 교수의 주장을 확실히 뒤집을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간송미술관은 지난해 기획전 ‘보화수보’를 벌인 것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채 문화재청이 대대적인 보수 정비 작업을 벌이고 있다. 간송 탄생 118돌을 맞는 내년에 간송재단은 미술관의 리모델링 재개관 계획을 잡아놓고 여러 행사들을 준비 중인데 뜻밖에 터져 나온 건물 설계자 논란으로 민감한 국면이 조성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문화재위원인 김기수 동아대 교수 등의 건축사 전문가들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의 1차 사료 아카이브가 빈약한 당대 건축사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면서 범학계 차원에서 이 건물의 내력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쪽은 “박길룡 건축가가 미술관을 설계했다는 내용은 간송과 그의 아들 전성우 선생 등을 통해 후손들한테 전언으로만 전해진 것으로 안다”며 “내년 상반기로 예정한 미술관 재개관을 앞두고 내부적으로 소장한 사료들을 정리해 학계와 공유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설계자를 둘러싼 진실을 밝히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일종의 유보적 입장을 밝힌 셈이다.
과연 간송미술관의 뿌리를 둘러싼 논란을 시간이 차근차근 해결해줄 수 있을까. 내년 상반기로 예상되는 간송미술관 재개관을 앞두고 귀추가 주목되는 이슈가 아닐 수 없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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