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 과학수사 리포트]① 재벌3세 마약 스캔들 기소까지…대검 법화학실, 모발 수백가닥 잘게 부숴 대마 성분 찾아냈다

노자운 기자 2023. 6. 8. 06:0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0년 무기징역이 확정된 고유정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 데는 검찰의 과학수사 공이 컸다. 검찰은 DNA 감정 기술로 고유정 차량 속 무릎담요에 묻은 혈흔에서 졸피뎀 성분을 검출했고, 이 혈흔이 피해자의 것임을 확인했다. 검찰이 강압적인 심문을 통해 수사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이렇듯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증거를 확보해 피의자를 가려내고 있다. 미드 CSI에서나 보던 과학 수사가 한국에서도 현실이 된 것이다. 조선비즈는 과학의 날개를 달고 진화하고 있는 검찰 수사 2.0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편집자 주]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법화학실에서 서승일 법화학감정관이 모발 감정을 통해 마약 복용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주완중 기자
우리는 이미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를 갖고 있다. 다시 한번 마약과 싸워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음은 없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신속하고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원석 검찰총장, 5월 8일 마약범죄 근절 대책회의에서

온 나라가 ‘마약과의 전쟁’에 한창이다. 검찰과 경찰, 관세청, 서울시,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교육부까지 발 벗고 나섰다. ‘그들만의 세상’에 존재하는 줄 알았던 마약은 어느샌가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올 초 실체가 드러난 이른바 ‘재벌 3세 마약 사건’은 마약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남양유업, 효성, JB금융그룹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 자제들과 전직 고위공직자 아들, 가수 등 총 20명이나 엮인 대규모 범죄였다. 검찰 수사 결과 이들이 미성년 자녀와 함께 사는 집에서 대마를 직접 재배하고 임신한 아내와 태교 여행 중 대마를 흡연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며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범죄수사부가 20명 중 17명을 무더기로 재판에 넘길 수 있었던 데는 ‘숨은 조력자’의 역할이 컸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법화학실이 그 주인공이다. 대검 법화학실은 마약감정 분야 국제공인시험기관(KOLAS)이다. 압수한 마약의 종류와 양을 측정하고 복용자의 소변과 모발을 이용해 복용 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마약의 물리·화학적 특성을 분석해 동일성 여부와 제조 방법까지 식별해내는 검찰의 해결사다. 법화학실의 김진영 실장, 서승일 법화학감정관, 김민경 보건연구사는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마약감정 전문가들이다.

◇머리카락 25mg 있어야 검사 가능…잘게 부숴 크로마토그래피로 분석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 별관에 위치한 법화학실을 직접 찾았다. 철통 같은 보안을 뚫고 들어가니 각종 분석 장비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갖가지 화학 약품 냄새가 뒤섞여 후각을 자극했다.

먼저 서 감정관의 안내를 받아 모발 감정이 이뤄지는 방 안을 살펴봤다. 실험대에 거꾸로 세워둔 6개의 시험관 안에 세척과 건조 과정을 거친 머리카락 뭉치가 들어 있었다. ‘재벌 3세’들의 모발도 이 실험대를 거쳐갔지만, 감정 단계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발은 보통 한 달에 1cm씩 자란다. 만약 머리카락 길이가 총 12cm라면 대략 최근 1년 간 마약 복용 여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셈이다.

“통상 마약 복용 여부 확인에는 모발 10mg이 필요하지만 대마의 경우는 25mg이나 필요합니다. 대마는 머리카락에 축적되는 양이 다른 약물의 100분의 1 밖에 안 되거든요.” 머리카락 뭉치를 가리키며 서 감정관이 설명했다.

대마가 다른 약물들에 비해 모발에 잘 축적되지 않는 이유는 산도(酸度)와 관련 있다. 마약을 감정할 때는 모발의 오염 가능성을 고려해 해당 약물의 대사체(세포·조직·체액 등에 존재하는 대사물질의 총체) 검출 여부까지 철저하게 확인해야 하는데, 대부분 약물의 대사체가 염기성인 데 반해 대마 대사체는 산성을 띤다. 산성 물질은 모발에 잘 축적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고체 상태의 모발에선 마약 성분을 검출할 수 없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잘게 ‘부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 감정관이 쇠구슬이 든 작은 통에 머리카락을 집어넣고 분쇄기에 넣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초고속으로 진동하며 순식간에 검은 가루가 돼버렸다. 여기에 메탄올을 용매로 넣으면 비로소 검출이 가능한 상태가 된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법화학실에서 김민경 보건연구사가 압수품인 대마초를 보여주고 있다. /주완중 기자

서 감정관이 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 질량분석기로 기자를 안내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래프가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크로마토그래피란 혼합물 속의 각 성분을 분리하는 기술의 일종이다. 혼합물이 이동상(mobile phase·수용액, 유기용매 등)에 녹은 상태로 고정상(stationary phase·고체 상태의 다공성 물질)을 통과할 때 각 물질들의 이동 속도가 다르다는 점을 이용한다. 결과적으로 물질에 따라 시작점에서의 이동 거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혼합물 분리가 가능하다. 크로마토그래피를 통해 나오는 결과물을 시간(가로축)과 물질 양(세로축)의 그래프로 나타낸 게 크로마토그램이다.

“모발에서 혼합물을 추출하면 약물만 뽑혀 나오는 게 아니에요. 메탄올에 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질이 뒤섞여 나옵니다. 그래서 이걸 30m짜리 모세관(고정상)에 통과시켜 크로마토그래피로 분리하고, 질량 분석 스펙트럼을 통해 각 성분이 마약이냐 아니냐를 확인해요. (그래프를 가리키며) 여기 이 두 지점에 다량의 물질이 통과한 흔적이 보이죠? 필로폰과 그 대사체인 암페타민입니다. 이 정도면 필로폰을 복용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죠.”

이처럼 모발에서 어떤 물질이 발견되면, 물질을 질량분석기에 넣어 전자를 충돌시켜 깨뜨리는 작업을 거친다. 서 감정관은 분자 구조가 깨지는 패턴을 보면 물질의 정체를 식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 물질이 필로폰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필로폰 표준품을 질량 분석기에 넣어 똑같이 전자를 충돌시키고 깨지는 패턴을 비교해보면 된다.

대검 법화학실이 보유한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기는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오랜 시간 동안 햇볕을 많이 받거나 탈색을 하면 약물이 검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음성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를 “복용하지 않았다”고 해석해선 안 된다. “복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지용성 물질’ 대마, 다른 마약보다 소변 감정 유효 기간 길어

모발 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바로 소변 감정이다. 소변은 모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내 복용 여부를 알 수 있는 시료다.

마약은 복용 후 시간이 지날 수록 체내 농도가 낮아진다. 사람이 물을 마시고 밥을 먹으면 마약 성분이 희석되고, 대소변을 통해 배출되는 과정도 거치기 때문이다. 히로뽕의 경우 일반적으로 2~3일 간 체내에 머물며 상습 복용자는 일주일까지도 지속된다고 한다.

반면 대마는 지용성이기 때문에 소변에 녹아들어 배출되는 대신 체내 지방에 머물러있을 가능성이 크다. 복용 후 길게는 한 달이 지나도 소변 감정을 통해 검출된다.

김민경 연구사가 소변예비분석장비가 있는 곳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소변에서 침전물을 제거한 뒤 소량만 덜어 넣고 예비분석장비에 넣으면, 면역반응측정법을 통해 양성 여부가 확인된다. 소변에 마약 성분이 없다면 미립자 약물접합체(microparticle drug conjugates)와 항약물항체(anti-drug antibodies)가 서로 엉겨붙는다. 그러나 마약 성분이 들어있다면 항약물항체 일부는 마약에, 일부는 미립자 약물접합체에 달라붙는다.

이 과정을 통해 마약 성분이 확인된다면 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에 넣고 양성 여부를 한번 더 검증한다. 김진영 실장은 “두 번에 걸쳐서 검사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굉장히 높다”며 “감기약을 먹었다고 해서 마약 양성 반응이 나오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재벌 3세’ 등의 소변뿐 아니라 이들에게서 압수한 말린 대마, 전자담배 카트리지도 김 연구사의 손을 거쳤다. 요즘 담배 흡연 트렌드가 연초에서 액상으로 넘어가고 있듯 대마도 마찬가지다. 전자담배 카트리지 안에 대마를 넣고 피우는 일도 흔하게 적발된다고 김 연구사는 전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법화학실에서 김민경 보건연구사가 소변예비분석장비를 통해 마약 복용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주완중 기자

◇ “분자구조 변형해 신종 ‘디자이너 드럭’ 만들어…인력난은 문제

일 평균 14건의 감정 의뢰를 받고 있지만, 수사와 감정이 분리돼있어 막상 누구의 모발·소변인지는 알기 어렵다. 사건이 언론 보도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진 뒤에야 주인이 누구였는지 아는 일도 부지기수다.

김 연구사가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수십년 전의 일인데, 마약 투약 혐의를 받던 한 연예인이 도망치려고 짐을 다 싸놓고 호텔에서 대기하던 중 소변 양성 반응이 너무 빨리 확인되자 당황해 창밖으로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어요(해당 연예인은 다행히도 무사했다). 우리는 막상 검사해 놓고도 누구의 소변인지는 몰랐어요. 나중에 신문 기사를 보고 나서야 그 연예인의 것이었단 사실을 알았죠.”

마약 범죄가 날로 급증함에 따라 힘든 점은 없을까. 서 감정관은 감정 건수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약물의 종류가 과거에 비해 굉장히 다양해졌다고 전했다.

“과거엔 마약의 효과가 어떻게 나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특정 효과를 내는 것이 마약의 ‘분자구조’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비슷한 구조의 분자는 비슷한 효과를 낼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해진 거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마약의 분자 구조를 수정해 디자인을 해놓고 합성을 하면 이른바 ‘디자이너 드럭’이 탄생합니다. 그렇게 신종 합성 마약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신종 마약이 등장할 수록 대검 법화학실의 업무는 가중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분석법을 만들어내야 하고, 대사체도 확인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마약 감정관 4명이 해내고 있다.

인력난과 업무 부담에도 법화학실 구성원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김 실장은 대마 검사를 일상적으로 자주 할 수 있는 나라가 전세계에 미국과 독일, 싱가포르, 그리고 우리나라뿐이라고 전했다. 대검 법화학실은 대마 검사 기술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했다. 상용화는 세계 최초다. 김 실장은 “특히 우리가 개발한 모발 감정 기술은 싱가포르에서 그대로 가져다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