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악과 싸우니 우리 잘못은 괜찮다’…최면 정치의 일상화

엄지원 2023. 6. 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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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민주당]위기의 민주당 (상)
위장탈당·코인…도덕 불감증의 징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박광온 원내대표가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자리하며 인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민주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언동이 당내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걸 방치하고 정치적 득실만 계산하는 우리 당 정치인들의 모습이 사실 가장 비극적이고 위기라고 느낀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최근 <한겨레>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런 진단은 의원 한 사람의 개인 의견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4월부터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김남국 의원 가상자산(코인) 투기 의혹’이 잇따라 터지고 당이 조기에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데 이어, 전면 쇄신을 내건 혁신기구 수장까지 임명된 지 9시간 만에 물러나면서 민주당 안팎에서 ‘전례 없는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겨레>가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7일까지 현역 국회의원, 당직자, 보좌관, 원외 인사, 전문가 등 30여명을 인터뷰한 결과, 당 안팎에선 최근 “민주당 정치가 무너졌다”, “당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도덕성이 바닥을 찍는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자조가 잇따랐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도 도덕적 위기는 있었지만 당시엔 무엇이 옳은가에 관해서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내에서 그런 기준을 흔드는 주장이 나오면서 진영의 존재 기반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있다”(초선 의원)는 것이다. 처한 상황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위기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생각은 다소 엇갈렸지만, 민주당이 전례 없는 도덕적 위기를 맞았다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졌잘싸’…책임지지 않는 정치

위기의 근원은 어디일까. 한 초선 의원은 “19대 대선(2017년)과 이어진 총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면서 국민들이 우리를 다 옳게 생각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어느 순간부턴 잘잘못을 가리고 도덕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예 사라졌다”고 돌이켰다. 그는 “(이후 20대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지면서도 패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통렬한 반성 대신 ‘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대선 직후 민주당 안에서 나온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란 자위적 구호가 위기의 경고음이자 징후였다는 평가다.

누적된 착각과 오만은 대선 직후 추진한 ‘검찰 수사권 축소법’(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그대로 노출됐다. 몇몇 당 관계자들은 민형배 의원의 ‘꼼수 탈당’을 최악의 사례로 꼽았다. 국회 상임위원회에 설치된 안건조정위원회는 여야가 타협을 하자고 만든 장치인데, 여기서 논의가 민주당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민 의원을 ‘무소속’ 몫으로 법제사법위 안건조정위에 넣은 뒤 법안을 힘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한 청년 원외 정치인은 “명분이 있으면 나머지는 어떻든 상관없다는, 기득권적 태도”라고 꼬집었다. 진보·개혁 진영은 전통적으로 절차와 과정을 중시해왔는데, 결과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며 패권주의적 태도를 보여줬다는 얘기다.

대선 이후 더불어민주당 주요 일지

이재명 대표의 보선·전대 출마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6·1 보궐선거 때 인천 계양을에 출마함으로써, 지도자의 ‘희생’과 ‘헌신’으로 위기를 돌파해온 민주당의 리더십이 퇴색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패장’이 선거 직후 다른 선거에 나서는 것도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거니와, 신승이 예상되는 경기 성남 분당갑을 피해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인천 계양을을 택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1999년 지역구인 종로를 뒤로하고 부산에 가서 민주당의 정치를 완성했지만, 이재명은 대선에 지고 계양을에 출마해 자기 정치를 완성했다.” 한 다선 의원의 냉소다. 노 전 대통령만이 아니다. 대선에 패배한 정동영 전 의장이 2009년 전북 전주 덕진 재선거에 출마하려 할 때 민주당은 공천을 주지 않았고, 손학규 전 대표는 2011년 보궐선거 때 사지인 경기 분당을에 걸어 들어가 승리하면서 야권 대선주자로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 대표는 대선 패배에 이어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은 지방선거까지 참패하고도 다시금 8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권을 쥐었다. 민주당 초선 의원은 “패배에 책임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자리에 가는 모습을 보며, 공동체를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한 장으로 바라본단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도덕이 밥 먹여주나’ 무뎌진 원칙과 도덕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대부분 이 대표를 둘러싼 윤석열 정권의 검찰 수사에 야당 탄압의 성격이 짙다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이 대표가 ‘기소 시 당직 정지’를 규정한 당헌 80조를 개정해 ‘예외’를 둘 수 있게 하고 적용받는 과정, 불체포특권 포기를 약속하고도 민주당을 ‘방탄정당화’한 모습에 실망감을 나타냈다. ‘조국 사태’가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을 초래하면서 도덕성 위기의 서막을 올렸다면, 대선 이후 당의 정치 지도자로서 이 대표와 측근들이 보여준 행보는 이런 위기를 가중시켰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 대표가 대선 패배 이후 출마해 당대표가 되고 당헌·당규를 고치고 이런 과정들을 보면 민주당이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잃은 상태가 됐다고 느낀다”며 “대선은 졌지만 당권은 놓치지 않겠다는 힘의 정치, 승패의 정치로 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 탓에 당 관계자들은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로 당장 의원들 몇명이 기소되느냐보다, 정치 도덕을 부정하는 ‘몰염치’의 언어가 당내에 만연한 게 더 큰 문제라고 봤다. 민주당의 한 다선 의원은 지난달 3일 열린 의원총회를 그런 몰염치의 현장으로 기억했다. 돈봉투 의혹에 연루된 윤관석·이성만 의원 탈당 직후 열린 의총에선 당 지도부의 미온적 대처를 성토하는 발언이 쏟아지던 가운데 한 지역구 초선 의원이 발언에 나섰다고 한다. “‘돈봉투 안 받아본 사람 있습니까. 그게 죽을죄입니까’라고 하더라. 정치인으로서 비공개회의에서도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라 너무 창피해서 말문이 막혔다.” 또 다른 의원이 기억하는 해당 의원의 현장 발언은 조금 다르다. “‘지지자들 밥도 안 사 먹이고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 거로 기억한다. 지지자들 밥값도 내주고 그래야 큰 지도자가 되는 건가 싶어 실소가 나왔다.” 발언의 ‘디테일’은 달라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다수의 당 관계자들은 돈봉투 의혹과 김남국 의원의 가상자산 투기 의혹 앞에서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고 입을 모았다. ‘국회의원은 재테크도 하면 안 되냐’거나 ‘민주당은 돈 벌면 안 되냐’, ‘정치가 돈 없이 돌아가냐’는 식의 노골적인 주장은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책임윤리를 망각한 언행이라는 것이다. 한 재선 의원은 “국회의원과 관련한 여러 제한 조건들을 법이 규정한 이유는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위해 절제하라는 뜻”이라며 “탐욕과 사적 이익을 극단적인 수준에서 추구하며 나타난 모습이 김남국 코인 사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태로 인해 민주당은 극단적 사익 추구 정당으로 낙인찍혔다. 아프고 충격적”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다선 의원은 “도덕을 거추장스러워할 정도로 우리 당 의원들이 뻔뻔해진 것”이라며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을 말한 노무현 정신은 배우지 않고 ‘노무현 마케팅’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의 현 위기 진단

“거악과 싸우니 작은 잘못은 괜찮다는 사고 버려야”

지금이 비상한 위기라는 데엔 당 안팎에 이견이 없지만, 167석 거대 야당엔 현재 자발적 정풍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당이 죽어가면 김근태나 노무현이 했던 것처럼 쇄신을 요구하면서 다수가 발작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전혀 없다. 어떤 문제 제기나 그저 불편한 계파 투쟁의 국지전으로 끝나는 이유다.”(한 보좌관)

문제는 의원들의 침묵이다. 한 다선 의원은 “초선 의원들은 패기를 갖고 당의 혁신을 부르짖는 대신 계파의 졸병 노릇만 하고, 중진 의원들은 선수에 맞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씁쓸한 속내를 비쳤다. 당 관계자들은 특히 “당이 민주화 시대와 다른 윤리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86 운동권 세대는 거악과 싸우며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거악과 싸우니 우리의 작은 잘못은 괜찮다’는 논리를 앞세워왔다. 당내 30~40대도 그런 86세대의 영향을 받으며 정치를 해와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다른 보좌관)

2012년 대선 이후 10년 가까이 당에 뿌리내려온 극단적 팬덤 정치와 결별하는 것도 과제로 꼽힌다. 김남국 의원의 코인 논란 때도 강성 지지층은 김 의원을 옹호하고, 김 의원을 비판한 청년 정치인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해 민심과 다른 인식을 드러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현재 민주당이 처한 상황을 “그 전과 질적으로 다른 위기”라고 설명했다. 돈봉투 의혹이 송영길 전 대표 등 ‘86세대의 문제’라면, 코인 투기 논란은 민주당의 ‘미래 세대’인 40대 정치인의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고, 이들을 감싸는 강성 지지층의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얽힌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 전반의 문제, 86세대라는 특정 세대가 아닌 모든 세대의 문제, 선출된 정치인뿐 아니라 지지층까지 포함한 문제가 되면서, 대중에게 세대교체를 통한 혁신의 기대마저 접게 했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표는 새로운 혁신위원장을 물색하는 중이다. 친명계에선 새로운 혁신위원장이 과감한 쇄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친명계 한 중진의원은 “혁신위원장 낙마가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며 “이런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더 과감하게 혁신을 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오는 12일 열릴 민주당 의원총회에선 당 혁신의 방향을 두고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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