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의 깊은 호흡] 시간의 힘

기자 2023. 6. 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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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9일, 일본 와세다대학의 국제문학관, 일명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에 초대받아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 개인에게 있어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는 2021년 10월에 개관한 도서관으로 올해 74세인 작가가 모교에 기증한 책과 음반, 전 세계에 번역 출간된 저서들의 아카이브 등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10대 시절부터 오랜 팬인 나로서는 그곳에서의 강연이 무척 뜻깊은 일이었다.

임경선 소설가

일본어로 진행한 강연을 무사히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한 일본 독자분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의 불확실한 벽>(국내 미출간)을 읽은 감상에 대해 물었다. 어릴 적 일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 바로 구해서 읽었던 나는 잠시 머뭇하다가 대답했다.

“레벨 차이가 나더라도 같은 작가들끼리만 간파하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번 책을 자기 인생의 마지막 장편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니 거의 확신을 하면서 썼구나 싶었다. 가슴 시릴 정도로 지극한 순수함에 대해 썼다는 측면에서. 마음 저 깊은 곳의 풍경을 숨김없이 다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하고 싶은 표현을 아낌없이 쏟아냈다는 측면에서. 마지막임을 의식할 때 사람은 극도로 순결하고 두려움 없는 상태가 되는데 그 초연함이 만들어낸 이 세상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이야기에 나는 읽으면서 조금 슬퍼졌다.”

소설을 분석하는 것도, 주제의식을 탐구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사적인 감상’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강연이 다 끝나자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초로의 남자분이 다가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 신작을 포함, 신쵸사(新潮社)출판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서들을 오랜 기간에 걸쳐 담당해 온 데라지마 데쓰야 편집자였다.

“아까 신작 소설에 대해 대답하신,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시면서 느낀 그 느낌은 정확해요.”

그는 웃으면서 불쑥 내게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담당 편집자가 돌연히 강연장에 나타난 것 자체에 나는 놀랐지만, 담당 편집자는 작가의 심경을 꿰뚫어본 한 외국인 독자에게 놀랐던 것 같다. ‘애정이 있는’ 대답이어서 감탄했다며, 그런 마음으로 읽어주어서 담당 편집자로서 고맙다고 했다.

데라지마 편집자는 그 후 내게 e메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시와 그의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소로 독자들을 데려가줍니다. 오랜 담당 편집자로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번 소설에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 또 하나는 ‘높은 벽에 둘러싸인’ 세계. 그곳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에겐 그림자가 없고, 도서관에는 책이 아닌 오래된 꿈들이 보관돼 있다. 특이한 것은 이번 장편소설은 1980년 작가가 갓 서른 살이던 신인작가 시절에 문예지에 발표한 중편소설을 기반으로 다시 쓴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 중편소설은 그간 발표한 글 중 유일하게 책으로 묶이지 않았을 만큼 작가 스스로 미흡함을 느껴 ‘언젠가 다시 써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것.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 ‘목에 걸린 작은 가시’가 70대에 접어든 작가를 기어코 일으켜 세웠고, 3년의 작업기간을 거쳐 장편소설로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많은 것들이 하루아침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고 잊히는 숨가쁜 시대에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떤 이야기를 가슴속 깊이 지켜내는 지극함을 생각한다. 작가의 성장과 변화를 긴 세월을 들여 지켜봐주며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 더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편집자의 신의를 생각한다. 그리고 쉼 없이 작품을 써온 작가의 책을 30년 넘게 꾸준히 읽으며 곁을 지켜온 독자인 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아간 이 충만한 감정이 결코 쉽게 흔들리지 않을 소중한 것임을 안다.

임경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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