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용 되는 유일한 사다리”… 중국판 수능, 역대 최다 1300만명 응시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3. 6. 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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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시험 ‘가오카오’ 시작

7일 오전 8시 30분 중국 대학 입학시험인 ‘가오카오(高考)’가 치러지는 베이징 차오양구 첸징룬중학교 시험장. 교문 앞에 붉은색 치파오(전통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치파오의 치(旗)는 한자 성어 ‘치카이더성(旗開得勝·군대가 깃발을 펼치자 승리를 얻는다)’의 첫 글자와 같아 중국에선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이 옷을 입고 시험장에 나타난다. 이날 치파오를 입은 아버지 왕모(47)씨는 “내 아들이 출세할 길은 명문대 진학”이라고 했다.

7일 중국 대학 입학 시험인 ‘가오카오(高考)’가 열린 장쑤성 난징의 한 고사장 앞에서 수험생들이 입장하려고 길게 줄 서 있다. 중국은 코로나 기간을 거치면서 재수생이 누적되는 등 올해 대입 응시생이 역대 최다인 1291만명에 달했다./AFP 연합뉴스

올해 가오카오엔 역대 최다인 1291만명(재수생 200만명 포함)이 응시했다. 중국 대입은 1977년 부활했다. 올해 입시를 치르는 2005년생 인구가 예년보다 많은 1617만명이고 코로나 기간 재수생이 누적되면서 대입이 바늘 구멍이 됐다.

역대 최고 입시 경쟁을 기록하면서 타오바오 등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복주머니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시험장 주변 숙소의 985·211호 객실은 일찌감치 예약됐다. 두 숫자는 중국에서 명문대 상징으로 통한다. 1998년 5월 장쩌민 전 주석이 발표한 명문대 육성 전략이 ‘985′이고 21세기 100개 명문대 계획이 ‘211′이기 때문이다.

한 캐나다 남성은 올해 중국인 아내의 고향인 랴오닝성 가오카오 시험장 앞에 치파오와 보라색 속옷, 나이키 운동화를 갖춰 입고 등장했다. 중국어로 캐나다는 ‘자나다(加拿大)’인데 첫 글자인 가(加)는 가점을 의미한다. 보라색 속옷을 입은 이유는 ‘즈딩(紫腚·보라색 엉덩이)’이 ‘즈딩넝싱’(指定能行·반드시 성공한다)이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나이키 로고는 중국 학교에서 채점할 때 맞은 문제를 표시하는 기호다. 중국 온라인에는 “이 남성의 모습을 수험생 자녀에게 부적 대신 보여줬다”는 글이 쏟아졌다. 쓰촨성의 50대 남성 량씨는 올해 27번째 가오카오에 도전해 ‘가오카오 딩즈후(釘子戶·알박기)’라고 불린다. 올해 15번째 가오카오에 응시하는 광시(廣西)좡족자치구 출신의 탕샹쥔(35)도 중국인의 ‘명문대 강박증’을 보여준다.

그래픽=백형선

중국에선 대입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4년제 대학 입학률은 39.9%였는데, 올해는 그보다 낮은 38%로 예상된다. 입시를 치르는 5명 중 2명 미만으로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명문대 문은 더 좁다. 중국에서 손꼽히는 100여 개 대학의 입학 정원은 60만명 수준이다. 수험생의 4.6%만 이른바 ‘명문대’ 간판을 딸 수 있다.

중국 대입 열풍이 뜨거운 것은 청년 실업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기준 16~24세 청년 실업률은 20.4%로, 2018년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취업을 해야 하는 대학 졸업자는 1156만명으로 사상 처음 1100만명을 돌파했다. 중국에서도 취업에는 ‘명문대 스펙’이 중요하다. 올해 항저우에서 취업한 베이징 출신의 톈모씨는 “베이징대·칭화대·영미 유학생은 베이징·상하이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에 간다”며 “나는 괜찮은 대학 출신인데도 항저우로 밀려났다”고 했다.

성공의 상징 '보라색 속옷' 입고 수험생 응원 - 한 캐나다 남성(오른쪽)이 랴오닝성의 대입 시험장 앞에서 중국 전통 의상 치파오와 보라색 속옷을 입고 수험생을 응원하고 있다. 중국어로 ‘캐나다’에 들어가는 ‘가(加)’자 역시 ‘가점’의 의미로 시험 성공을 뜻한다. /더우인

최근 중국에서 ‘가오카오’는 신분 상승의 유일한 사다리로 인식된다. 1949년 공산화와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도 신분 이동이 어려워진 사회가 됐다. 훙얼다이(혁명가 후손), 푸얼다이(부유층 후손), 관얼다이(고위 관료 후손) 등이 좋은 일자리와 높은 지위를 손쉽게 차지하고 있다. 남은 자리를 두고 좋은 대학을 나온 평범한 가정 출신들이 경쟁하는 경우가 많다. 개천에서 용이 되는 가장 확실한 기회가 ‘가오카오’인 셈이다. 매년 최소 30만위안(약 6000만원)이 드는 해외 유학도 상류층이나 부유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부모들은 한 명뿐인 자녀를 위해 한국만큼 적지 않은 사교육비를 쓰고 있다.

경쟁 열기를 타고 각종 부정 행위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올해 베이징의 시험장 입구에는 국제공항 수준의 보안 검사대가 설치돼 전자기기 반입을 원천 봉쇄했다. 또 시험장마다 CCTV를 설치하고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감독관을 배치했다. 지난 2020년 두 수험생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답을 공유하다 적발돼 집행유예 5년, 벌금 6000위안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미대 입시에선 대학생이 대신 실기시험을 치렀다가 형사처벌되기도 했다. 가난한 명문대생이 거액을 받고 부유층 자제의 시험을 대신 쳐주다가 걸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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