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유럽 가스대란, ‘따뜻한 날씨’가 해결한 게 아니다

김홍수 논설위원 2023. 6. 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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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 역동성’이 해결사… 가격 기능이 수요·공급 조절
한국 정부는 ‘가격 통제’ 남발… 결국 비싼 비용 치르게 돼
지난해 러시아가 유럽행 천연가스 밸브를 잠그자 국제 천연가스 가격이 10배로 폭등했다. 하지만 당초 우려와 달리 유럽 가스대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따뜻한 날씨' 덕도 있었지만, 유럽 가스대란을 잠재운 것은 시장경제의 역동성이었다. 사진은 러시아 노르트스트림2 가스 수송관./AFP 연합

재테크 고수를 자처하는 지인이 지난해 미국 천연가스 선물(先物)에 투자했다가 쪽박을 찼다. 현재 수익률은 -78%. 어디서 판단 착오가 있었을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에 대한 보복 조치로 천연가스 수송관 밸브를 잠그자, 유럽 전역에서 가스 대란이 발생했다. 공급 부족 탓에 천연가스 가격이 10배로 폭등했다. 천연가스 생산국 미국이 대체 공급자가 될 만한데, 텍사스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출터미널이 화재로 마비됐다. 유럽에선 선박에 실려온 LNG를 다시 기화시켜 각 가정에 공급하는 기반 시설이 부족했다. 대서양 양쪽에서 LNG 기반 시설을 갖추는 덴 3년 이상 걸린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천연가스 가격 폭등세는 그해 겨울까지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지인이 천연가스 선물에 투자한 이유였다.

하지만 시장 경제의 역동성은 지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유럽 각국 정부가 가스 수요 감축을 유도하려 가스 가격을 2~3배 올리자, 가정에서 가스 사용량을 대폭 줄이기 시작했다. 알루미늄, 시멘트, 종이 등 에너지 소비가 많은 기업들은 제품 생산을 줄였다. 공급 감소분은 시장에서 수입품으로 대체됐다.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가장 높았던 독일은 선박 형태 부유식 LNG터미널을 불과 194일 만에 완공했다. 미국 혁신 기업들은 지상 LNG터미널 대신 선박을 이용한 해상 액화시설을 만들어 유럽으로 LNG를 대량 수출했다. 시장이 놀라운 역동성으로 러시아 가스 공백을 메우자 천연가스 가격은 얼마 안 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지난겨울 유럽 가스대란을 막은 것은 ‘따뜻한 날씨’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사 역할을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코로나 사태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사태 초기 마스크 대란은 수많은 기업이 제조설비를 갖춰 공급에 나서면서 금방 해결이 됐다. 코로나 백신도 글로벌 제약사들이 신속히 생산설비를 갖춰 대량 제조에 나서면서 80억 지구촌 시민들이 2~3번씩 맞을 정도로 충분히 공급됐다.

경제학 교과서는 가격 메커니즘이 정상 작동하면 경제 문제는 대부분 저절로 풀린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교과서의 상식을 무시하는 일이 너무 잦다. 주된 이유는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치’ 탓에 전기료를 5년 내내 묶어놓아 한국전력을 ‘빚더미’ 부실기업으로 만들었다. 소득 주도 성장을 추구한다며 최저임금을 마구 올렸다가 ‘고용 참사’를 낳았다. 정부가 유류세를 조정해 기름값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은 우리나라를 에너지 과소비국으로 만들고 있다. 작년부터 정부는 ‘시장 금리 결정자’가 돼 ‘관치 금리 시대’를 다시 열었다. 한국은행은 한미 간 금리 역전을 무시한 채 기준금리를 계속 동결하고, 금융 당국은 은행 팔을 비틀어 예금·대출금리를 끌어 내렸다.

하지만 경제에 ‘공짜 점심’은 없다. 인위적 금리 통제로 1년 정기예금 금리가 미국은 5%대, 한국은 3%대로 역전되면서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환율 상승은 수입물가 상승을 촉발해 취약계층의 소득을 수출기업으로 이전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지난해 외환보유액이 400억달러 급감하는 등 환율 방어 비용도 막대하다. 금리는 시장에서 효율적인 자금 배분의 기준점 역할을 한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좀비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돼야 산업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된다. 관치 금리는 금리의 가격 기능을 마비시켜 시장의 자정 기능을 훼손한다. 선진국들이 가격 메커니즘을 존중하고 시장 개입을 자제하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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