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서정시대] 모든 삶은 흐른다, 모든 삶은 오른다

김지수 인터뷰 작가 2023. 6. 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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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인생의 비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이라는 제목으로 7월에 출간될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신간에 추천사를 쓰던 중,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모든 삶은 흐른다’의 작가 로랑스 드빌레르의 편지였습니다. 내가 보낸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장을 생각보다 빨리 보낸다는 내용이었죠. 인생을 등반에 빗댄 ‘산의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인생을 항해에 빗댄 ‘바다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 동시대 가장 농밀한 문장을 쓰는 두 프랑스 철학자를 동시에 마주하다니!

사실 두 질문은 저의 오랜 화두였습니다. ‘인생은 오르는 것인가?’ 아니면 ‘흐르는 것인가?’

산의 시간과 물의 시간. 산의 시야와 물의 시야는 인생 ‘플레이어’인 우리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알다시피 산은 수직과 중력(Gravity)의 시간. 50세가 될 때까지 저는 올라가거나 내려왔고, 다시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립(Grip)’과 ‘그릿(Grit)’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산의 시야로 사는 동안 저는 ‘갈망’이라는 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쓰고, 일정량의 거리를 이동했습니다(성장조차 일종의 위치 이동이 아니던가요).

오십대에 이르니 자연스럽게 ‘물의 시간’에 가까워지더군요. ‘내 힘으로 되는 게 없구나’를 깨달을 때마다, 온 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수영의 자세는 자아의 무게를 덜어주죠.” 로랑스 드빌레르의 답을 읽으며 저는 웃으며 몸을 떨었습니다. 흐름의 세계에서는 오직 ‘친절’과 ‘감사’의 연료를 태워, 시간의 보살핌에 몸을 맡길 뿐. 부디 잘 흘러가도록, 고자세에서 저자세로 몸을 바꾸면서요.

늘 그렇듯 문장은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갑니다. 여러 각도로 몸을 공글리며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울창하게 뿌리내린 작가의 뉴런의 숲을 산책하는 것.

‘인생의 비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을 읽을 때, 저 자신, 절벽을 뛰어오르는 산양이 된 듯, 노년의 활력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모든 삶은 흐른다’는 갈피마다 파도가 넘실대서, 저는 망망대해를 향해 돛을 달고 거침없이 나아갔지요. 바다의 가이드는 밤의 등대지기처럼 부드러웠고, 산의 가이드는 히말라야의 셰르파처럼 신중하고 대담했습니다.

특별히 산과 바다가 감춰둔 심연의 두 얼굴을, 저는 사랑했습니다.

늑대와 고래.

‘늑대의 눈은… 세상을 관조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서늘한 아름다움입니다’라고 산의 철학자는 묘사합니다. 우리 모두 별을 향한 긴 울음을 삼킨, 길들여진 늑대일지도 모르지요. 바다의 철학자는 잠수하는 고래를 보며 ‘신의 얼굴’을 목격했다고 했습니다.

“지구가 제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 같았어요”라는 드빌레르의 우정 어린 고백에 저는 잠시 눈을 감고 수면 아래로 머리를 담가야 했습니다. 영화 ‘아바타: 물의 길’에서 본 ‘툴쿤’을 상상하면서요. 반도의 딸이자 산악지대의 시민인 저는 프랑스 두 철학자에게 산과 바다를 누비는 한국의 해녀와 심마니를 소개했습니다. 타고난 숨그릇(폐활량)을 긍정하는 지혜, 길을 잃고 길을 내는 매일의 용기, 서로에게 목숨을 의탁하는 동료애, 전복을 따고 약초를 뜯을 때의 단호한 악력….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겁에 질려 동공이 흔들릴 때마다, 저는 늑대의 눈과 고래의 숨, 해녀와 심마니의 펄떡이는 두 손을 떠올립니다.

제가 오래 머물던 산동네 언덕을 떠나 물가 동네로 이사한 건, 순전히 철거를 앞둔 아파트가 싼값에 임대로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분투와 눈물, 고립과 적요로 쌓아올린 산의 시간만큼, 은은한 채로 흘러가는 물가의 시간도 좋더군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모인 자매들처럼, 대학 친구들과 한적한 어촌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리라는 것도, 30년 전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해가 지면 어른들은 마당에 숯을 피워 생선을 굽고 와인을 마셨고, 해가 뜨면 아이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바다로 나갔습니다. 비와 바람과 햇빛과 안개가 변화무쌍해, 하루에도 여러 번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것 같더군요. 여행이 끝나갈 때, 한 친구가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음번엔 우리 함께 ‘오름’을 오르자.”

삶의 정수가 오름에 있는지, 흐름에 있는지, 산인지 바다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짐을 싸서 떠나는 것일지 모릅니다. 혼자 오르다 함께 흐르고, 함께 흐르다 혼자 내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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