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인공지능 시대, 예술가의 쓸모에 관한 단상
세상을 향해 남다른 질문…아티스트 역할 유지 고대
이상헌 춤비평가·부산시립무용단운영위원
예술가를 규정하기 간단하지 않지만, 보통 예술(창작)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전업 예술가로 부르는 이들은 사회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이런 의문은 서구의 경우 기원전 고대부터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지금의 시인과는 다르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시인이 이상적인 국가에서 쓸모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쓸모를 의심하는 눈길에서 자유로운 적이 한 번도 없었을 만큼 세상은 유독 예술가에게 가혹했다. 고대 중세를 거쳐 19세기까지 예술가는 왕실 종교 귀족 같은 페이트런(후원자)의 요구와 구미를 맞추면서 살아갔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시장에서 자신의 쓸모를 놓고 경쟁할 수 있게 됐지만,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예술가의 쓸모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 일어났다. 인공지능 챗GPT가 집필하고 네이버 파파고가 번역한 책 한 권이 출간 하루 만에 8000여 부가 매진된 것이다. 시작부터 판매까지 일주일 걸렸다고 하니, 기획부터 출판까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일 년을 쉽게 넘기는 현실에서 놀라운 일이다. 작년 11월 말에 조용히 등장한 챗GPT가 불과 6, 7개월 만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성장하면서 예술가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분야들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통해 예술가의 쓸모를 생각하게 하는 또 다른 예가 있다. 국립극장은 사람만 할 수 있다는 예술에서 기술의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의도로 연주회 ‘부재(不在)’를 기획했다. 6월 30일 공연 예정인 ‘부재’는 한국생산기술연구소가 개발한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6’와 현재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 감독인 최수열 지휘자가 각각 다른 곡을 지휘하고, 다시 같은 곡을 번갈아 지휘하는 공연이다. 예술에서 기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동시에 지휘자가 ‘부재’하는 무대를 통해 지휘자(예술가)의 역할과 존재 가치에 관해 질문을 던질 것이라고 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예술가의 역할을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를 예측하려는 ‘부재’의 실험에는 과학 기술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인간 언어를 쓰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예술가의 쓸모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프로그램을 쓸 줄만 알면 누구나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 없이 사진 이미지와 동영상과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시험 삼아 챗GPT에 본문의 특정 단락을 입력하고, 문장을 완성하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두루뭉술하고 일반적인 내용이었지만, 논리적 오류나 문법적으로 어색한 부분 없는 문장을 답으로 내어놓았다. 만약 사용자가 밝히지 않으면 인공지능이 만든 것과 예술가가 작업한 결과물을 쉽게 구별할 수 없을 것 같다. 글쓰기를 위해 자료를 참고하듯 인공지능을 보조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고, 앞선 사례처럼 인공지능이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쓸 수도 있다. 가뜩이나 20세기 들어 창작자로서 예술가의 독보적인 지위가 위태로워졌는데,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예술가라는 명칭조차 의미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든다.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고, 쓸모를 창출해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동안 불안정한 계약과 모욕적인 수준의 보수를 견디면서 힘들게 지켜왔던 예술가의 자부심이 많이 흔들리고 있지만, 어쩌면 이 시대가 예술가는 곧 창작자라는 독보적이지만 부담스러운 역할에서 자유로워질 기회를 줄 수도 있다. 끊이지 않았던 쓸모에 관한 논쟁과 도무지 걷힐 기미가 없는 의심 속에서도 ‘시대의 즉물적 탐욕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존재’로 자위하면서 견뎌 온 예술가는 갈수록 모호해지는 존재 가치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정도가 되어야 ‘예술가’로 인정하는 자본과 대중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지고, 환경 차별 전쟁 난민 동물권 등 저항해야 할 세상의 즉물적 탐욕으로 인한 문제는 커지기만 한다. 저항하는 존재로서 예술가로 살아가기도 너무나 힘겨운데, 가뜩이나 인공지능까지 예술 영역에 더 깊게 들어온다면,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부는 지금처럼 창작 과정을 직접 주도해 결과를 창출하는 역할을 유지하겠지만, 예술의 다른 많은 부분에서는 질문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인공지능은 질문(요구)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질문을 해야 인공지능이 예술적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들을지, 어떤 질문이 예술적 결과를 불러올지를 고민하는 존재 말이다. 그런데 예술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였다. 여태껏 예술가의 질문과 해석이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서였다면, 지금은 질문 자체에 방점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인공지능의 시대, 예술가의 쓸모는 질문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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