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민주당, 간절하고 절박한가
정치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한다. 그래서 정당 혁신은 오래 걸린다. 그만큼 오래갈 수 있는 혁신이 중요하다. 자원이 많지 않은 야당의 혁신은 더 어렵다. 대부분의 야당 혁신이 자해적 권력투쟁에 그친 이유다.
맨 처음 인물과 시스템을 두고 격렬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러다 지도부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참신한 외부 인사로 물갈이와 제도 정비를 시도한다. 정치 시장에 내부 수술을 맡겨도 안 되면 다음은 비대위 출범, 당명 변경이 동반된 신장개업이다. ‘혁신은 실패하고 방만 바꿔버리는’(김수영의 ‘그 방을 생각하며’ 인용) 식이다. 책임정치는 기대 난망이다. 혁신 주체가 다음엔 혁신 대상이 되고, 혁신할수록 기득권만 공고해지는 악순환 앞에 혁신 실패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겠나. 하물며 거대 입법권력이라 온갖 기득권이 얽힌 더불어민주당은 오죽하랴.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살짝 비틀면 ‘민주당의 변증법’이다. 프랑스혁명 지도자들을 단두대에 세웠던 계몽주의자들처럼 계몽이 계몽을 배반한 역설. 야당의 혁신은 민주당이 민주당을 배반한 암흑사였다.
단, 혁신이 됐던 때와 되지 않았던 때의 차이는 있다. 간절함이다. 혁신의 막차 격인 ‘신장개업’만 해도 평화민주당·열린우리당은 간절함의 결과였다. 평민당 창당은 호남 차별과 빨갱이 굴레에서 김대중을 벗어나게 하려던 간절함이었고, 열린우리당 창당은 독수리오형제와 개혁당, 천신정이 후단협으로 휘청대는 노무현을 살리려는 간절함이었다.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이 민주당 혁신위원장 지명 당일 낙마했다. 사인 시절 과격한 발언이 발목을 잡았다. 거대 정당일수록 ‘다른 소리’를 낼 때는 상식에 부합되는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개된 발언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정도면 문제 될 일 아니라고 가볍게 지나쳤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 아닐까.
그의 친이재명 행보도 혁신 수장 적절성에 흠집을 냈다. 민주당의 위기는 정책과 노선을 둘러싼 고차원적 균열이 아니다. 팬덤·수박 논란 등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태도’의 문제, 돈봉투·가상자산 의혹과 상임위원장 인선 파문 등에서 보듯 정치인의 생명인 공공성·헌신을 상실한 ‘도덕성’ 문제에 있다. 어느 때보다 혁신기구는 독립적이어야 하고, 혁신위원장은 혁신 과제를 상징하는 메시지여야 한다. 그런데도 주류에 가까운 혁신위원장을 앉혀놓고 적당히 권력만 나누면 된다고 생각한 걸까. 윤석열 정권 실정으로 그래도 총선은 해볼 만하니, ‘쪽팔리는’ 일부 사건도 시간만 가기를 기다린 건 아닐까.
“정당의 혁신은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한다.” 여야의 혁신·공천 작업에 관여했던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이 이런 진단과 문제의식을 던졌다. 그는 “(민주당은) 혁신위 마지막에야 다루는 내부 권력 쟁점(대의원제 폐지)부터 꺼냈다. 정치개혁 하겠다는 공약도 지키지 않은 당이 이런 혁신을 하겠다고 하면 국민들이 신뢰할까. 또 혁신은 기존 질서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힘이 있어야 한다. 민주당의 힘은 지도부가 주력이고, 지지자들이 다음 주력이다. 혁신이 어려운 여건이다. 지금은 위기의 실체를 찾고 혁신 동력을 어디에서 찾을지 소통하고 토론할 때”라고 말했다. 의제 관리 능력도, 혁신 의지도 없다는 단호한 평가였다. 백번 맞는 말이다.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야당이 있는 체제를 뜻한다. 여당을 견제하는 반대 정당, 수권 능력이 있는 대안 정당으로 설 때 정당 민주주의가 있다는 의미이다. 정당 민주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오해할 경우 빠지기 쉬운 덫이 통합이냐 개혁이냐의 딜레마이다. 이재명 대표도 지금쯤 임계점에 왔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통합과 개혁은 취사선택 대상이 아니다. 여권을 견제하는 능력이 개혁이고,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력이 통합이다. 절충안으로 균형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지만 전 사회가 퇴행하는 상황에서 균형은 단기적 열정, 순간적 에너지에 불과할 뿐이다. 야당이 역할을 못하면 정당 민주주의는 공허해진다. 아니 그 전에 시민들이 불행해진다.
이대로 가면 한국판 ‘앙마르슈’(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거대 양당의 구태정치를 청산하기 위해 나섰던 정치쇄신 운동)가 벌어질 수 있다. ‘포스트 이래경’ 찾기에 앞서 지금 얼마나 심각한 위기인지, 혁신이 필요한지, 어떤 혁신이어야 하는지 위기와 혁신의 철학부터 세우길 바란다. 민주당은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절박한가.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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