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단상] 천년의 미래, 그리고 정암을 기억하는 일

경기일보 2023. 6.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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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세환 광주시장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는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내리는 제도를 법령에 명시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전사자를 국장으로 예우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근대에 와선 미국의 노력이 가장 두드러진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최근까지 전쟁에 참여한 자국 병사에게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와이에 전쟁 포로 및 실종자 확인 합동 사령부를 설치해 세계 각지에서 전사자의 유해를 수습하고 기리는 일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고 그 유가족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를 위한 희생을 많은 국민이 기억하고 선양하는 것이 공동체의 생존과 지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즉, 호국보훈은 국가의 안보, 국방과 직결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하고 기능과 역할을 확대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아주 깊은 조처라 평가할 수 있다. 1961년 군사원호청으로 출발해 1985년 국가보훈처가 됐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위상의 부침이 컸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5월 출범하면서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 보훈’을 110대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다. 이번 국가보훈부의 승격으로 새 정부 출범 1년 만에 그 약속이 실현된 것이다.

광주시는 오랜 역사만큼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그 가운데 정암 이종훈 선생(1856.3.2~1931.5.2)은 특히 광주시민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다. 정암 선생은 20대에 동학운동에 나섰고 3·1 독립선언문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정암 선생은 고려혁명위원회 활동 등 자주독립을 위해 다방면의 항일운동을 펼쳤다. 정암 선생의 아들 이동수(이관영으로도 불림)는 일본 유학 중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귀국해 의병대장이 돼 전투를 지휘하다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손자 이태운 역시 보성전문대에 재학 중 3·1운동에 앞장섰고 독립신문 보급 등 항일 언론인으로 독립정신을 고양했다. 이렇게 정암 선생 가문은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보기 드문 ‘호국의 명문가’다.

정암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하지만 선생의 존함과 생애를 기억하는 국민은 드물다. 국회의원, 시·도의원, 광복회와 보훈단체 회원,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올해 3·1절 기념식에서 광주시는 정암 선생을 추모하고 광복회원 3명에게 표창을 수여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정암 선생의 일대기를 돌아보는 영상을 시청했으며 정암 선생의 후손인 이천희 옹이 선생의 업적을 보고하는 특별한 자리를 갖기도 했다.

광주시는 ‘희망 도시 행복 광주’를 시정의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있다.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시민 중심의 도시, 소통과 화합의 도시로서 천년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비전을 하나씩 실천하고 있다. 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매컬러는 “과거를 잊은 국가는 기억을 잃은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고 설파했다. 광주시 천년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비전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호국보훈의 달, 광주시가 정암 선생을 추모하고 선양하는 마음의 옷깃을 다시 여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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