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 ‘샬로트 사르’는 어쩌다 무자비한 ‘폴 포트’가 되었나

한겨레21 입력 2023. 6. 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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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그가 일으킨 대참극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복했다 . 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25 년 5 월 19 일 캄보디아 캄퐁톰 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넓은 농지를 소유한 부유농이었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대규모 강제이주와 집단농장제를 통한 강제노동 정책 , 그리고 킬링필드라는 반인륜적 학살을 저질러 수많은 캄보디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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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동남아시아]100만 명 넘는 희생자 나온 참극 초래한 무자비한 캄보디아 독재자 폴 포트… 반성은 없었다
크메르루주 몰락 뒤 캄보디아 정글로 피신한 폴 포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나오키 마부치, 한겨레 자료 사진 확인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80803/1p9h8312.html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 아시아의 히틀러 , 히틀러와 스탈린에 버금가는 독재자 … . 폴 포트 (1925~1998) 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말들이다 . 그는 캄보디아의 급진적 공산주의 크메르루주 (1975~1979) 정권을 이끌며 100만 명 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참사 ‘ 킬링필드 ’ 의 원흉이다 .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트 사르’다 . 폴 포트는 프랑스어의 ‘ 폴리티크 포탕시엘 ’(Politique Potentielle) 의 줄임말로 ‘ 정치적 가능성 ’ 을 뜻한다 . 그는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 대삼촌’ (Grand-Uncle), ‘ 형’ (Elder Brother), ‘ 첫째 형’ (First Brother), ‘87’ 등 여러 가명을 썼다 . 자기 정체를 감춰 국제사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많은 가명 뒤에 가려진 진짜 폴 포트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

크메르루주의 잔혹행위와 대학살

캄푸치아 공산당 크메르루주 의 지도자인 폴 포트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1913~1985) 정권에 대항하며 수년간 내전을 지속하다가 1975 년 프놈펜을 점령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 폴 포트는 자신이 꿈꾼 ‘ 자급자족적 농업 중심의 유토피아 ’ 를 건설하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가 권력을 장악한 1975 년 4 월부터 권력을 빼앗긴 1979 년 1 월까지 3 년 9 개월 동안 극악무도한 인권침해와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 폴 포트는 프놈펜을 점령하자마자 200 만 명을 농촌 지역의 집단농장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 죽고 병사했다 . 집단농장에서 비인도적인 강제노동을 하다가 또 수십만 명이 기아 , 과로 , 질병 , 구타 , 감금 , 폭행으로 사망했다 .

이전 정부와 관련되거나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많은 지식인과 전문직 종사자 , 종교인이 무자비하게 처형됐다 .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소수민족도 숙청 대상이었다 . 처형의 죄목은 매우 자의적이고 모호했다 . 안경을 끼거나 손이 곱다는 이유로 노동을 모르는 지식인으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 불충하다고 의심되는 공산당 당원이나 군인도 표적이 됐다 .

프놈펜의 투올슬렝 감옥은 크메르루주 시기의 잔혹함을 상징한다 . 정치범 수용소이던 이 감옥은 크메르루주 시기에 꾸준히 수감자가 늘었다 . 무고한 사람들이 이 수용소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 처형 방식도 잔인했다 . 총알을 아낀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때려 죽이거나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시키기도 했다 . 한 번 들어가면 살아나온 사람이 거의 없어 ‘캄보디아의 아우슈비츠’라고도 불렀다 .

폴 포트가 정권을 잡은 동안 약 200 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 이는 당시 캄보디아의 총인구 4분의 1 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였다 .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끈 독재자 폴 포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폴 포트

폴 포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그가 일으킨 대참극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복했다 . 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25 년 5 월 19 일 캄보디아 캄퐁톰 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넓은 농지를 소유한 부유농이었다. 폴 포트의 가족은 캄보디아 왕족과 긴밀한 관계였는데, 사촌누나와 이복누나가 당시 왕인 시소와트 모니봉 (1927~1941 년 재위 ) 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 폴 포트는 이복누나와 가까운 사이라 그를 찾아서 후궁들이 머무르던 공간에 여러 차례 방문했다 .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기 힘들던 1930 년대의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당시 최고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소수의 지식인이었다 .

폴 포트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 그가 다니던 미셰학교 에서 초등교육 졸업장을 받는 데 예정보다 2 년이나 더 걸렸다 . 그는 중학교 졸업 뒤 1948 년 캄보디아의 명문 리세시소와트 고등학교에 합격했으나 , 이후 상급반 진학에 실패해 기술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이는 곧 전화위복이 됐다 . 이 기술학교의 최고 학년에 편입한 1949 년 , 폴 포트는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 공과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 1900 년대 초부터 이때까지 자비 유학생을 포함해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캄보디아인이 250 명이 채 넘지 않았던 시기다 . 폴 포트는 이제 더욱 극소수의 상류층이 됐다 .

투올슬렝 박물관에 전시된 크메르루주의 젊은 전사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스 파리 유학과 크메르루주 활동

1949 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24 살의 ‘살로트 사르’ 는 처음으로 좌파와 공산주의 사상을 접한다 .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혁명 이후 공산주의 사상 연구가 활발했다 . 1951 년 그는 파리로 유학 온 다른 캄보디아 학생과 함께 마르크스 클럽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공부했고 , 얼마 뒤 프랑스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 이 시기 폴 포트는 나중에 크메르루주를 함께 이끈 캄보디아의 젊은 좌파 민족주의자 그룹과 교류하게 된다 . 폴 포트와 동지들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주의 , 그리고 프랑스혁명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 폴 포트는 캄보디아 사회를 공산화해 사회 불평등을 제거하면 캄보디아도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듯하다 .

그는 파리에서 공부보다 혁명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 2 학년 통과 시험에서 2 년 연속 떨어져 장학금 지급이 중단됐다 . 결국 그는 학위 없이 3 년6개월 정도의 파리 체류를 마치고 1953 년 프놈펜으로 돌아가야 했다 .

귀국 뒤 폴 포트는 프놈펜에서 캄보디아의 마르크스 - 레닌주의 운동 (Cambodia's Marxist – Leninist Movement) 의 중심 멤버로 활약했다 . 당시 군주제에 반대하며 노로돔 시아누크 (1941~1955 년 재위 ) 왕의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에 참여했던 그는 , 1970 년 쿠데타로 론 놀이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우익 친미 정권을 수립하자 이번에는 시아누크와 연합해 론 놀 정권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 작은 무장단체에 불과하던 크메르루주가 확대된 것도 이 무렵이다 .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국왕을 지키기 위해 크메르루주에 들어왔다 . 크메르루주는 결국 1975 년 론 놀 정권을 전복하고 프놈펜을 점령했다 . 이 성과는 역설적으로 캄보디아 암흑시대의 서막이었다 .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의 최후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대규모 강제이주와 집단농장제를 통한 강제노동 정책 , 그리고 킬링필드라는 반인륜적 학살을 저질러 수많은 캄보디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결과 국민의 마음을 잃었다 . 1979 년 1 월 베트남 침공으로 크메르루주 정권은 몰락했다 . 폴 포트를 비롯한 크메르루주의 간부들은 타이 국경 근처 정글로 후퇴했다 .

그곳에서 1990 년대까지 게릴라전을 계속했지만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 1997 년 6 월 폴 포트는 조직 지도부에서 강제로 축출돼 동료들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 그 해 7 월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가지 않고 다음해인 1998 년 4 월 15 일 수면 중에 73살로 사망했다 . 엄청난 인명을 앗아간 최악의 독재자치고는 너무나 평화로운 최후였다 . 죽은 지 사흘이 지나 그의 주검은 주변의 타이어와 쓰레기 더미 위에서 화장됐다 .

폴 포트는 권력에서 몰락해 죽을 때까지 자기 잘못을 뉘우친 적이 없다 . 자신이 저지른 강제 정책을 ‘ 실수 ’ 라고 하거나 자기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 . 크메르루주가 쫓겨난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 크메르루주의 범죄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 그 정권에 몸담은 인사 중 아직 권력 가까이에 있는 이들도 있다 .

2022 년 9 월 , 프놈펜에서 캄보디아특별재판소 (ECCC) 의 마지막 재판이 있었다 . 흔히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으로 부르는 이 재판은 20 세기 후반 최악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크메르루주 집단의 책임자들을 단죄할 목적으로 열렸다 . 그러나 16 년이라는 긴 시간과 국제사회가 기부한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단 5 명을 재판에 회부해 3 명에게 무기징역을 판결하는 데 그쳤다 . 그마저도 크메르루주 정권의 최고위층은 재판 중 , 또는 복역 중 사망해 마지막 재판을 피해갔다 .

크메르루주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두개골.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 츠엉에크에 수많은 사람이 학살돼 매장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소수 지식인의 그릇된 신념이 낳은 비극

폴 포트의 전기를 쓴 필립 쇼트는 크메르루주 대학살의 원인 중 하나로 1970 년대 이래 계속된 미국의 무자비한 공습을 꼽는다 . 이로 인해 폴 포트 정권이 급속도로 과격해지고 폭력화됐다는 것이다 . 폴 포트가 지상에 모든 도시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을 말소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순수한 이념에서 이 모든 일을 시작했음을 강조하려는 이도 있다 . 하지만 아무리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참담한 비극은 전혀 옹호될 수 없다 .

크메르루주 몰락 뒤 40 여 년이 지난 오늘날, 캄보디아는 여전히 폴 포트의 잔혹한 유산과 싸운다 .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 사상에 세뇌돼 살아남으려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수행한 소년병들은 아직도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 폴 포트 정권기에 악몽 같은 경험을 겪은 생존자들을 지원하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는 이도 있다 . 대학살을 기억하는 50 대 이상의 사람들이 현재 캄보디아 인구의 10% 에 불과하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다 .

투올슬렝 교도소와 킬링필드의 유골들은 소수 지식인의 그릇된 신념이 얼마나 큰 불행과 비참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는지 잊지 못하게 한다 . 최악의 지도자 한 사람이 초래한 최악의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

하정민 서강대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끈 독재자 폴포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크메르루주 정권기에 그들이 착용한 복장. 검은 옷에 빨간 체크무늬 머플러를 둘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놈펜 외곽에 있는 투올슬렝 감옥, 일명 S-21은 고등학교 건물을 강제수용소로 개조했다. 이곳에서 많은 무고한 사람이 감금, 고문, 폭행, 처형당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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