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中 겁박에 맞선 호주의 ‘조용한 완승’

이철희 논설위원 입력 2023. 6. 7. 23:44 수정 2023. 6. 8.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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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因은 배짱과 행운, 실용외교의 결합
‘경제강압’ 시대, 韓 생존전략 다듬어야
이철희 논설위원
이른바 ‘늑대전사 외교’와 함께 중국식 겁박 외교의 대명사가 된 ‘경제적 강압’을 국제사회가 맞서 싸워야 할 핵심 이슈로 공론화한 나라는 호주였다. 2020년 호주가 중국의 코로나19 기원과 책임 규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자 중국은 대놓고 호주의 국내 정치에 간섭하고 언론 논조까지 문제 삼으며 호주산 보리와 와인, 석탄, 목재, 바닷가재의 수입을 막는 대대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다. 대중국 수출 비중이 37%에 달한 호주로선 전례 없는 위기였다.

호주는 굴복하지 않았다. 동맹과 우방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중국의 강압에 맞선 대항전선 구축을 촉구했다. 호주 외교장관은 외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안주머니에서 중국 측이 던진 모욕적 요구, 이른바 ‘14개 불만 사항’ 메모지를 꺼내 보이며 분노와 결의를 표시하곤 했다. 그런 호주의 배짱은 통했다. 호주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일시적이었다.

잠시 위축됐던 호주의 대외 수출은 다시 치솟았고 작년엔 사상 최대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이미 올해 초 호주산 석탄을 사들이기 시작한 중국은 최근 목재 수입을 재개하고 보리에 매긴 80% 관세도 재검토에 들어갔다. 중국이 부과한 무역장벽이 거의 다 철회된 것이다. 사실상 완벽한 호주의 승리였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상어의 공격으로 뜯긴 보드에 의지해 살아 돌아온 서퍼처럼 호주는 놀랄 만큼 강건한 모습으로 부상했다”고 극찬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3월 말 ‘거부하고 뿌리치고 억제하라’는 제목으로 낸 보고서도 중국의 강압이 목표 달성은커녕 역효과만 냈다며 호주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중국의 표적이 됐던 8개국 사례를 분석한 결과 중국의 강압은 미미한 성공에 그친 전반적 패착이었다고 진단했다. 호주 리투아니아에선 전술적·전략적으로 모두 실패했고, 한국 일본 캐나다에선 엇갈린 전술적 성패 속에 전략적 실패를 맛봐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전히 군사적 수단보다 리스크가 적은 경제적 강압을 앞세운다. 경제적 약소국과 비대칭 우위 분야를 표적으로 삼아오던 중국은 최근 미국의 최대 메모리칩 제조업체 마이크론에 대해 ‘안보 위협’을 이유로 제재를 가했다. 미국은 “명백한 경제적 강압”이라고, 중국은 “미국이 협박 외교의 원조”라고 맞선다. 그 와중에 한국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메우는 문제(backfilling)로 미중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 갔다.

이런 미묘한 시기에 중국은 미국과 한층 밀착하는 우리 정부를 향해 거친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석연찮은 이유로 한국인 축구선수가 4주 가까이 구금돼 있고, 난데없이 한국 포털사이트 접속이 차단되는가 하면 연예인 방송 출연이 취소되는 등 조짐이 심상치 않다. 벌써부터 제2의 사드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 핵심 인사들은 중국의 오만한 기세가 꺾이기 전까지는 ‘당당한 외교’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에 저자세를 보일 이유는 없다. 동맹과 국제연대의 힘, 더욱이 중국에도 절실한 우리 반도체 기업이 있는 만큼 중국도 한국을 다시 표적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정교한 대응책, 나아가 예방적 관리외교일 것이다.

호주가 중국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데는 그 배짱 못지않게 자원부국이란 행운이 작용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호주의 철광석은 중국도 건드리지 못하는 든든한 지렛대가 됐고, 중국 수출이 막힌 품목들은 쉽게 대체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해 정권교체의 효과도 한몫했다. 새 정부는 “용(龍)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며 조심스럽게 중국에 퇴로를 열어주는 실용외교를 폈다. 요즘 호주는 그 승리를 드러내놓고 자랑하지도, 국제무대에서 중국에 날을 세우지도 않는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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