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경 국민의힘 의원 "독립운동에 좌우 있었지만 목표는 `독립` 하나…애국심으로 통합했으면"

임재섭 2023. 6. 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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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경 국민의힘 의원. 박동욱기자 fufus@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 박동욱기자 fufus@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 박동욱기자 fufus@

"독립운동가인명사전이요? 몇 년간은 예산이 수반되지 않아 멈춰있던 사업이었는데, 독립기념관의 '친일인명사전도 있는데 독립운동인명사전은 왜 없느냐'는 말을 듣고 기재부 담당 사무관이 너무 충격을 받아 예산을 배정했다고 해요."

독립운동사 사전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발족 때를 떠올리는 윤주경(64) 국민의힘 의원의 입술은 감정이 복받친 듯 떨렸다. 지난주 국회에서 만난 윤 의원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막상 의사결정 과정에선 보훈 논의가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윤 의원이 인생 후반부에 독립운동가 보훈에 '올인'하는 계기가 됐다.

윤 의원은 젊은 시절 윤봉길 의사의 손녀라는 배경과 무관하게 광고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 그가 독립운동 기념사업에 참여하고, 정치까지 참여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도 예전에는 보통사람처럼 살았다.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윤봉길 의사이고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들었기에,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인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코우 공원에서 의거를 하셨고 상해로 가시기 전에 농촌 계몽운동을 했다는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3·1 운동 80주년(1999년)때 14대 광복회장을 지낸 윤경빈 회장이 상해를 같이 가보자고 했다. 상해에 간 때가 12월이었는데 영하는 아니지만 습도가 높아 뼈마디가 시리더라. '만국공묘에 참배하러 갔다. 그곳에 모셔진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에 그대로 살려고 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분들이 많았는데 왜 이분들이 여기까지 와서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가야했고, 고국도 아닌 이곳에 묻혀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니 얼마나 조국의 광복이 절실했는지가 느껴졌다. 독립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됐다."

이때부터 윤 의원은 윤 의사를 넘어 독립운동가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윤 의원은 "윤 의사는 의거하기에 앞서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 임시정부를 만드는 데 앞장섰던 분들이 있었고 또 윤 의사 의거 후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간 이어간 분들이 있어서 광복이 이뤄지지 않았나"라며 "이것들을 기념하고 국민들과 함께 공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렇게 인연을 쌓아가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깊어가던 중 독립기념관 이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아 독립기념관과 인연을 맺었다. 보훈 가족과 함께하는 인생 2막을 살게 된 것이다. 윤 의원은 "지금도 여전히 (독립운동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사람들이 저는 독립운동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에게는 그게 부담"이라고 했다.

하지만 윤 의원이 독립운동의 모든 것을 알기를 바라는 대중들의 시선과 달리 윤 의원은 우리 사회가 독립운동과 보훈에 대해 잘 모른다고 설명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서 언급한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이다. 윤 의원은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임하던 중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가 주도하고 국가보훈처에서 지원한 독립운동가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1993년부터 독립운동사 사전 편찬이 시작됐지만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윤 의원은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펴는 과정에서 느낀 게, 사전에 1만 400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담아야 하는데 글을 써줄 수 있는 필진은 근현대사 연구자까지 모셔도 130명밖에 안 됐다"라면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항인데 여기에 원고료까지 열악하다는 말이 나왔고 자료가 거의 없는 분들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윤 의원은 활동과정에서 보훈을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와 끊임없이 부딪쳤다. 윤 의원은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그를 쉬지 않고 움직이게 했다. 윤 의원은 "제가 21대 국회에 (국민의힘)비례 1번으로 국회에 들어왔는데, 각 당 비례 1번은 선거 과정에서 방송출연을 하게 되지 않느냐"라며 "가장 충격적인 것은 어느 날 방송국을 일찍 갔는데 내가 왔는지 몰랐던지, 관계자가 '이 여자 정말 웃기지 않느냐, 방송 나가면 맨날 독립운동 얘기만 한다'는 말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은 아는 것도 많고 이슈도 많은데 나만 작은 이슈를 갖고 나오는 것처럼 느껴져 창피했다. 그런데 좀 지나고 나니 '그렇게 하찮고 좁은 영역이라면서 왜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나' 하는 오기가 생기더라. 내 역할이 그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 뒤에 지방을 방문해 참전용사분들을 만나다 보니, 또 정말 가슴 아픈 말이, 차라리 경로우대를 받는 게 경제적으로 편의가 더 큰데, 내가 과거 나라를 지켰다는 자존심과 자부심 때문에 국가 유공자를 버리고 경로우대를 못 선택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빈 곳이 여전히 많고 채워야 한다는 걸 절감했다."

윤 의원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 참여, 보훈부 승격을 주장하며 국정과제에도 국방국정과제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보훈의 영역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때 실무자들은 마지막까지 '(국정과제가 방대해지는데) 꼭 그래야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윤 의원은 "꼭 그래야겠다고 했다. 보훈 가족들은 100장이 되든 200장이 되든 보훈 관련 국정 과제가 더 눈에 들어온다. 100장인 국정과제가 102장이 된다고 얼마나 늘어나겠나. 참 답답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박민식 보훈처장, 이종찬 광복회 회장 등과 함께 국가보훈처의 보훈부 승격을 이끌어냈다. 보훈부는 지난 5일자로 출범했다.

윤 의원은 보훈은 단순히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에 대한 예우나 존중이 끝이 아니라고 했다. 윤 의원은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라를 찾으려고 고생을 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들이 문학이 되고 영화·연극이 되면서 국민들을 감동 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그렇게 문화와 역사가 만날 때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고, 그때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나라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나아가 윤 의원은 역사와 보훈 논쟁이 정치로 흐르는 현실에 개탄했다. 윤 의원은 "독립운동이 좌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갔듯이, 멋진 대한민국을 위해 분열과 갈등을 넘어 국민이 하나가 되면 어떨까, 애국심으로 통합의 길을 가는 데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정치영역에서 자신이 역사의 심판자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한쪽이 심판되는 것이 아닌, 공감을 통해 긍정의 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정말 역사를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사는 학자들의 연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에 의해서 토론되고, 거기서 합의점을 찾아 나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면서 어떻게 긍정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저에게 항상 요구하는 것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심판자의 역할인데, 그때마다 힘겹다. 제가 이건 옳고 틀리다는 이야기를 못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로부터 '윤봉길 의사의 손녀로 할 일을 못 한다'는 식으로 비난도 많이 받는데, 그래도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다. 늘 고민하면서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독립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함께 찾아 나가고 내가 아는 소수라도 같이 공감을 하면서 긍정의 힘을 만들어내고 싶지, 갈등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무능하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그렇다."

윤 의원은 최근 대통령실에 보훈비서관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보훈부 승격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대통령 지근 거리에 참모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윤 의원은 "기재부·행안부의 입장에서 보훈 가족을 보살피는 것은 원호의 개념을 못 벗어난 것이다. 보훈부는 보훈가족의 입장에서 보훈가족들이 명예롭고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위해 무엇이 이루어져야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보훈이기 보훈은 어떻게 보면 외교가 될 수도 있고 국방이 될 수 있고 교육이 될 수 있으며 복지가 되기도 한다"면서 "그런 전체를 아우르려면 대통령실에서 국가원수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보훈비서관을 뛰어넘어 사실 외교영역의 국가안보실처럼 국가보훈실이 있으면 더 좋다"고 말했다.

윤 의원은 "그런 면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말이었다. 아마 다른 의원들은 (보훈이)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이지만 저에게는 전부이기 때문에 절실하니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보훈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 윤 의원. 그는 "희망을 놓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윤 의원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다른 것은, 친일파는 발 밑의 현실밖에 못 봤기에 우리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믿어 친일을 했지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현실과 미래를 보면서 '미래엔 반드시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라고 본다"면서 "내가 봐도 요즘 청년들의 삶은 너무 어렵고 내가 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게 너무 안타깝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갖고 매일 매일 사는 것과 절망을 갖고 사는 것은 천지 차이지 않겠나. 희망을 가지고 살자고,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제가 마음이 아픈 부분은 우리가 광복이 됐을 때 독립운동의 길을 간 어르신들이 '내가 뭘했다', 동시에 '그때는 독립운동의 길을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니었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국민소득 100불도 안 되던 시절에는 국가로부터 무언가 보상을 바란다는 게 아마도 자신들의 애국심과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것이고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는 선진국이 됐는데, 나라가 어렵고 국가 예산이 어렵다는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제가 공약 만들고 할 때 너무 화가 나서 '보훈이 무슨 먹다 남은 식은밥 던져주는 것이냐, 따끈따끈한 밥을 제일 먼저 퍼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지'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창피한 말(웃음)이지만 말이 그렇게 나가더라. 많은 보훈 가족들이 그런 마음을 갖고 사니까. 보훈대상자라는 말 보다도 '보훈 가족'으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임재섭기자 yj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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