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보사노바의 여왕'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영면에 들다[김성대의 음악노트]
LP를 가끔 산다. 살 때 기준은 하나다. '두고두고 들을 앨범인가'. 그걸 자문하고 '그렇다'이면 사고 먼지가 쌓일 확률이 높다 싶으면 과감히 포기한다. 장르 구분 없이 나는 그런 LP들만 산다. 모으기 위한 모음이 아닌, 들으려 사다 보니 절로 모이는 것이다. 'Getz/Gilberto'는 내 그런 LP 구매 기준에 부합해 장에 꽂혀 있는 앨범 중 한 장이다. 사람의 일생은 의외로 짧아서 새 음악만 찾아 듣다간 자기가 좋아했던 음악을 다시 들을 기회를 잃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리스너라면 누구든 선택의 기로에 선다. 트렌드를 얕게 섭렵할 것인가, 과거 앨범들을 더 깊이 들을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고 선택에 후회는 없다. 내가 알고 살았다 생각하는 앨범, 뮤지션들을 사실은 잘 몰랐다는 사실을 수시로 깨우치는 즐거움은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느끼는 흥분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기쁨을 내게 준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Getz/Gilberto'를 꺼내 들었다. 더불어 이 앨범과 작품이 나오게 된 상황, 사연을 다룬 재즈 책들을 함께 읽었다. 이유는 글 마지막에 얘기하겠다.
1958년 브라질의 국민 가수 겸 배우 엘리제테 카르두수가 [Cancao do Amor Demais]를 발표해 자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극작가 겸 작곡가이자 외교관이기도 했던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요청 끝에 나온 이 작품엔 비니시우스의 가사에 무명의 서른 살 작곡가가 만든 선율이 담겨 있었다. 작곡가의 이름은 통 조빙(Tom Jobim)으로 불린 안토니우 카를루스 브라질레이루 지 알메이다 조빙(Antônio Carlos Brasileiro de Almeida Jobim)이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전설에 기반한 1956년 연극 'Orfeu da Conceicao'에 넣을 음악을 위해 비니시우스가 조빙을 기용한 이 앨범에선 조빙의 친구인 기타리스트 주앙 지우베르투가 몇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고요하고 서정적인 그의 스타일은 곧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장르 이름을 얻을 것이었다. '보사'는 '혹'이란 뜻으로, 무언가에 혹이 있다는 건 재능 또는 감각이 있다는 브라질식 포르투갈어 표현이라고 한다. '노바'는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보사노바는 '새로운 감각' 정도로 풀어볼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재즈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다. 미국은 그런 재즈를 냉전 시대에 활용할 선전도구로 여겼다. 1959년 쿠바 혁명 뒤 국무부가 후원해 연주 투어에 나선 미국 재즈 음악가들은 이 시기 남미를 많이 찾았다. 브라질의 삼바는 그 중심이었다. 위대한 트럼페터 디지 길레스피도 1961년에 브라질에 갔다. 그는 제리 멀리건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쿨 재즈에 영감을 얻은 조빙의 음악을 진지하게 연구한 거의 첫 번째 미국 재즈 뮤지션으로 역사에 남는다. 길레스피는 제목부터 "화음에서 어긋난"을 뜻하는 'Desafinado'와 브라질의 'Kind of Blue'라 일컫는 주앙 지우베르투의 앨범 타이틀 곡 'Chega de Saudade'를 미국으로 가져와 녹음했다. 앨범 'Chega de Saudade'는 길레스피가 브라질에 가기 1년 전 캐피톨 레이블을 통해 미국에서 발매됐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잊힌 작품이었다.
보사노바를 미국으로 들여온 재즈 음악가 중 중요한 또 한 사람은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였다. 안드레스 세고비아와 장고 라인하르트의 영향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고집했던 모던 재즈 기타리스트 찰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남미에 3개월을 머물며 보사노바의 텍스처와 음량이 기타로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라틴 음악이라는 걸 깨닫는다. 조빙의 표현대로 보사노바는 침착하고 간결하며 진지하면서도 서정적인 맑고 정제된 삼바, 그리고 비밥만큼 전통과의 단절을 각오한 탄력적인 음악이었다. 리듬에서 이 장르는 재즈의 심장이라 할 수 있을 스윙보단 흔들림(Sway)에 더 가까웠고, 화성에선 선율의 불협화음을 선호하며 복잡한 코드 변화를 즐겼다고 재즈 평론가 게리 기딘스는 썼다. 그런 보사노바에 한눈에 반한 찰리는 스탄 게츠라는 걸출한 색소포니스트를 만나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되니, 이것이 그 이름도 직관적인 'Jazz Samba'의 출발이었다.
고등학생 때 이미 천재적인 실력을 보인 스탄 게츠. 우디 허먼의 'Early Autumn'에서 쏟아낸 인상적인 솔로로 명성을 얻은 그는 그러나 고질적인 약물 문제로 잠시 유럽으로 가 있어야 했다. 1961년 미국에서 위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 클래식과 재즈 기법을 접목한 'Focus'라는 앨범으로 복귀한 게츠는 그해 12월, 워싱턴 DC의 클럽에서 자신의 쿼텟과 연주한 뒤 백스테이지로 온 찰리 버드를 만난다. "내가 브라질에서 가져온 앨범을 함께 들어보자." 앞서 국무부 후원 투어에 동참한 찰리가 브라질에서 가져온 그 앨범은 지우베르투의 LP였고, 게츠와 찰리는 이런 음악(보사노바)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데까지 대화를 발전시켰다. 게츠는 막연히 예쁜 음악이라고만 생각한 보사노바에서 '따뜻한 톤과 은근한 전달력, 멜로딕한 테마, 절묘한 화성적 가미'라는 구체적인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1962년 2월, 게츠와 찰리는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와 함께 올 솔스 유니테리언 교회(All Souls Unitarian Church) 홀에서 'Jazz Samba' 녹음을 시작한다.
찰리의 밴드에는 동생 진 버드(기타, 더블베이스)와 베이시스트 케터 베츠, 그리고 드러머 두 명(빌 라이헨바흐와 버디 데펜슈미트)이 있었다. 드럼 두 대라는 편성은 보사노바의 "변칙적이고 넘실거리는" 비트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이들이 가세한 녹음 세션은 세 시간에 일곱 곡을 해치우는 괴력을 과시했다. 앨범은 그해 4월에 나왔다. "히트는 기대하지 않았다." 게츠는 훗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처음엔 지지부진했지만 황금 시간대에 라디오 방송을 타며 'Jazz Samba'의 판매량은 급증했다. 음반은 9월 15일 빌보드 팝 앨범 차트(지금의 '빌보드 200')에 이름을 올린 뒤 연말에 2위까지 오르더니, 이듬해 3월엔 마침내 차트 정상까지 차지한다. 재즈 앨범으론 최초 기록. 'Jazz Samba'는 이후 무려 70주 동안 해당 차트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았다. 찰리와 게츠의 작품이 촉발시킨 보사노바 붐은 장르 앨범 발매 유행으로 번져 1년이 채 안돼 "엘라 피츠제럴드부터 롤러 스케이트장 오르가니스트까지" 보사노바 음반을 내며 20여 장이 한꺼번에 세상에 나왔다. 심지어 보사노바 볼펜, 보사노바 운동화까지 관련 제품들은 물론 로큰롤 황제 엘비스마저 'Bossa Nova Baby'를 발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야말로 보사노바 광풍이라 할 만했는데 그 핵심에 있던 게츠는 'Desafinado' 한 곡으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
1963년, 게츠는 제대로 된 보사노바 앨범을 만들기 위해 뉴욕에서 활동을 시작한 조빙, 지우베르투를 만났다. 그 과정에서 크리드 테일러와 함께 조빙을 섭외해 완성한 앨범이 'Jazz Samba Encore!'였다. 전작의 성공을 의식한 상업적 냄새가 물씬 나는 제목이었지만 보사노바의 원조격인 조빙이 몇 곡에서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한 건 분명 의미가 있었다. 작품엔 브라질 퍼커셔니스트 두 명(파울로 페레이라, 호세 카를루스)이 합류, 기타는 프랑스의 거장 루이스 봉파가 맡았다. 마이크는 봉파의 애인(나중에 아내가 된다) 마리아 톨레도가 잡는다. 역설적으로 보사노바 전성기였기에 오히려 주목받지 못한 이 앨범은 "10년 뒤에 더 좋아할 작품"이라고 쓴 평론가 존 윌슨의 말대로 나중에 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건 브라질 음악가들과 내는 게츠의 첫 번째 프로젝트였을 뿐이다. 그는 테일러와 비슷한 콘셉트로 보사노바 앨범 두 장을 더 구상해 둔 상태였다.
같은 해 3월, 게츠는 마침내 보사노바의 핵심 인물들인 조빙과 지우베르투를 동시에 섭외해 봉파의 세션에서 함께 한 베이시스트 토미 윌리엄스, 브라질 드러머 밀튼 바나나까지 데리고 스튜디오로 들어간다. 그리고 또 한 명, 그들 중 유일하게 영어가 유창했던(아스트루드의 아버지는 언어학자였다) 주앙의 아내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가 함께 했다. 조빙과 주앙이 게츠와 함께 한 일이 중요한 이유는 게츠의 모든 보사노바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조빙이 작곡하고 지우베르투가 녹음한 곡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앨범이 그 유명한 'Getz/Gilberto'였다.
'Getz/Gilberto'는 앨범에서 피아노까지 연주한 조빙의 8곡으로 채워졌다. 당시 예비 리허설에서 몇 곡은 포르투갈어 대신 영어로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누군가 했다는 말이 있다. 노먼 김벌이 영어 가사를 붙인 'Garota de Ipanema(The Girl from Ipanema)'와 진 리스가 영어 가사를 쓴 'Corcovado(Quiet Nights)'가 그 대상이 됐고 노래는 함께 있던 아스트루드가 '시험 삼아' 불러보았다. 테일러와 게츠는 직업적으로 노래한 적이 없는 아스트루드의 "간결함과 꾸밈없음, 미세하게 진동하는 인토네이션"을 가진 목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 급기야 주앙에게 아내의 정식 녹음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빙과 주앙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아스트루드는 전문 가수가 아닐뿐더러 대중 앞에서 노래한 적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 아스트루드가 완전히 '초보'는 아니었다. 그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어머니 에반젤리나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음악을 일상처럼 접했고, 남편과도 대학 콘서트 무대 등에서 꾸준히 노래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반대는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스트루드는 앨범에서 두 곡을 불렀고 그 경험은 이후 자신이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전문 가수'로 성장한 계기가 됐다.
아스트루드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The Girl from Ipanema'는 실화다. 엘로이사 핀투(Heloisa Eneida Menezes Paes Pinto)라는 17세 소녀가 실제 이파네마 해변을 매일 걸어 다닌 것인데, 그가 카페테라스 앞을 지나치는 모습을 보던 남성들 사이에 조빙과 비니시우스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히트가 뻔히 보였던 이 싱글은 애초 5분 30초에서 2분 여를 줄인 3분짜리 팝 버전으로 편집돼 라디오 전파를 탔다. 사람들은 아스트루드의 "연약하고 어리고, 다소 불안한" 목소리에 곧장 빠져들었다. 아마도 엘로이사 핀투라는 '이파네마 해변의 소녀'가 직접 부르는 듯 들렸을 것이다. 이 곡은 빌보드 차트에 12주 간 올랐다. 곡을 수록한 앨범 'Getz/Gilberto'는 빌보드 2위에 올랐는데 이유는 비틀스의 'A Hard Day's Night'가 차트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92주 간 'Getz/Gilberto'는 빌보드 차트에 장기 투숙을 했다.
지난 6월 5일, 남편을 따라 간 스튜디오에서 보사노바의 슈퍼스타로 거듭난 아스트루드가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1959년 주앙과 결혼한 아스트루드는 명반 'The Astrud Gilberto Album'으로 첫 발을 떼 2002년작 'Jungle'을 유작으로 10여 장 앨범을 남겼다. 1996년에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Red Hot+Rio' 앨범에 참여, 조지 마이클과 함께 'Desafinado'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끝을 알 수 없는 긴 휴가'를 선언하고 마지막 작품을 낸 2002년엔 인터내셔널 라틴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으며, 6년 뒤엔 라틴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아스트루드는 말년을 동물 권리 운동에 바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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