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역사상 가장 슬픈 날"…PGA투어, 오일머니 앞에 무너지다
두 단체 공동법인 설립하면서 허무하게 끝나
미 골프 전문가 "PGA투어, 골프 미래 팔아"
LIV 이적생들, 앞으로 PGA투어 대회 출전 가능
사우디 국부펀드, PGA투어 지분 상당 확보
사우디 달래기 나선 미국 정부 '입김' 분석도
세계 골프 패권을 두고 서로에게 칼끝을 겨눴던 미국프로골프(PGA)투어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후원을 받아 열리는 LIV골프(이하 LIV)의 총성 없는 전쟁이 하루 아침에 막을 내렸다. PGA투어와 PIF, PGA투어의 파트너 단체인 DP월드투어(옛 유러피언투어)가 합병에 합의하면서다. PIF가 PGA투어의 지분 상당 부분을 소유할 것으로 보인다. PGA투어 선수 출신 골프 해설가 브랜던 챔블리는 “골프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라며 “PGA투어는 골프의 미래를 팔았다”고 평했다.
이 세 단체는 7일 공동 성명을 내고 “골프라는 종목을 전 세계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합의를 이뤘다”며 “LIV와 PGA투어, DP월드투어는 사업 권리를 결합해 공동 소유 영리 법인으로 이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2021년 10월 새 투어를 출범하며 PGA투어 선수들을 대거 빼 온 LIV와 LIV로 건너간 선수들을 제명하는 등 강하게 대립해 온 PGA투어·DP월드투어는 2년도 안 돼 한 배를 타게 됐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에 따르면 이 세 단체의 수장들이 지난달 초 마스터스 토너먼트가 끝난 뒤 물밑 접촉을 시작했고, 최근 7주간 협상을 이어온 끝에 합의에 다다랐다.
◆LIV 선수들, PGA투어 출전 가능해져
이날 세 단체가 낸 성명을 통해 합의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세 단체가 함께 운영하는 공동 소유 영리 법인을 설립한다. 이 법인을 통해 PGA투어와 DP월드투어, LIV골프를 아우르는 새 투어가 만들어진다. 세 단체는 일단 남은 2023 시즌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하고, 내년부터 이 신규 투어를 출범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 PGA투어 대회들은 그대로 두고, 새 투어는 현재 PGA투어가 상위랭커들을 위해 만든 ‘특급 대회’들을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외신들은 세 단체가 공동 선언문에서 “새 법인은 세계 최고 선수들의 경쟁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것을 근거로 들었다.
둘째, PIF는 새 법인의 독점적 투자자로 참여한다. 미국 야후스포츠는 “새 법인의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는 PIF가 유일한 투자자가 되며, 이 법인이 외부 투자를 받을 때 PIF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PIF가 사실상 세계 골프를 인수합병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제이 모너핸 PGA투어 커미셔너가 새 법인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고, 야시르 알-루마얀 PIF 총재는 이사회 회장직에 오를 예정이다.
셋째, LIV골프로 이적한 선수들의 PGA투어 복귀를 가능하게 한다. PGA투어와 DP월드투어, LIV골프는 이날 발표와 함께 서로 진행중인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합의했다. 세 단체는 “올 시즌 종료 후 PGA투어 또는 DP월드투어 회원 자격 재신청을 희망하는 선수들에게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치킨 게임’에 지친 두 단체
서로를 죽일듯 노려보던 LIV골프와 PGA투어가 돌연 손을 잡은 배경을 두고 외신들은 여러 해석을 내놨다. 일단 그동안 ‘치킨 게임’ 같던 두 단체의 대립이 서로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PGA투어는 LIV 소속 선수들의 출전 금지 처분을 내릴 때 미국 법무부로부터 ‘반경쟁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또 LIV의 거액을 포기하고 잔류한 선수들을 달래고자 무리하게 상금 규모를 올리면서 재정적인 면에서도 큰 타격을 입었다. LIV는 선수들 이적료로만 수 조원을 써가며 투자했으나 시청률에서 PGA투어에 완패하는 등 영향력 확대에 애를 먹고 있었다.
사우디 끌어 안기에 나선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PGA투어가 그동안 LIV와 대립각을 세운 건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2018년 사우디 출신의 워싱턴포스트 소속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피살된 사건의 배후로 미국 정보 당국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배후로 지목했고, PGA투어를 비롯한 미국 골프계도 이런 이유로 LIV가 ‘스포츠 워싱’을 위한 단체라며 출범 자체를 비판해왔다.
그러나 현재 중국과 대립 중인 미국은 중국의 석유 위안화 결제에 동조하고, 최근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7년만에 정상화한 사우디와 관계 개선에 나섰다. 미국과 사우디가 세계 골프 패권 전쟁을 끝낸 이날 공교롭게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사우디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PIF 이사회 의장이기도 한 빈 살만 왕세자에게 미국이 LIV골프-PGA투어 합병이라는 선물을 준비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신념 택했던 PGA 잔류파, 낙동강 오리알 신세
LIV와 PGA투어의 합병 소식이 전해지자 거액의 이적료를 버리고 PGA투어에 잔류한 선수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확천금의 기회를 ‘신념’ 때문에 포기한 리키 파울러(35·미국) 등 허리급 선수들에겐 이날 발표가 황당할 수 밖에 없다. 야후스포츠는 “우즈는 앞서 LIV로부터 8억달러(약 1조404억원)의 제안을 뿌리쳤다”며 “우즈는 그 돈이 없어도 그만이지만 (세계랭킹 44위로 ‘허리급’인) 리키 파울러는 7500만달러(약 975억원)를 받고 LIV로 갈 기회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PGA투어의 ‘수호신’을 자처한 로리 매킬로이(34·북아일랜드)는 아예 합병 소식을 미리 귀띔받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선수들은 그동안 LIV로 이적한 선수들을 ‘위선자’라고 했던 모너핸을 가리켜 ‘그가 진짜 위선자’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모너핸 커미셔너는 “선수들의 비판을 받아들인다”며 “과거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안다. 그러나 그 때 상황이 그랬고,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로 LIV로 넘어갔던 선수들은 ‘최종 승자’가 됐다는 평이 나온다. LIV로 이적하며 거액을 챙겼고, 이번 합병을 통해 다시 예전처럼 PGA투어에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필 미컬슨(53·미국)이다. 미컬슨은 지난해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스포츠 선수 수입 순위에서 최근 1년간(2021년 7월~2022년 7월)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골프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1억38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파악됐는데 이 중 대부분이 LIV 이적료였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합병이 사우디의 승리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PGA투어(1929년 출범, 1968년 PGA로부터 독립)와 통합까지 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도 “이번 합병으로 사우디의 야망은 최정상 수준의 국제 스포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까지 확대됐다”고 적었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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