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지워도 되살아날 때…” 디지털 성범죄 상담원의 무력감
상담원, 상담 휴대전화 ‘한 몸’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에 피로
“(가해자한테) 계속 연락이 와요.” “주말 동안 (가해자가) 또 영상을 유포하면 어떡하죠?”
전북 전주에 위치한 성폭력예방치료센터 부설 전주성폭력상담소. 지난 4일 오전 8시30분, 사무실에 출근한 한그루(활동명) 활동가가 상담용 휴대전화를 열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호소하는 상담 메시지가 3건 들어와 있다는 알림이 떴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상담사로 일한 지 3년, 한그루 활동가는 매일 아침 “상담용 휴대전화와 이메일, 누리집에 들어온 피해 상담 신청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피해자가 얼마나 힘들지, 저희에게 연락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을지 생각하면 긴장되기보다 일에 더 집중하게 되거든요.”
한그루 활동가가 근무하고 있는 이 상담소는 전국 14곳의 ‘디지털 성범죄 지역 특화상담소’(특화상담소) 중 한 곳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서울에만 있어, 지역에 사는 피해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들을 돕기 위해 여성가족부가 2021년부터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신고 접수·상담과 피해영상물 삭제 연계 및 수사·법률·의료 연계, 치유 회복 프로그램 지원 등이 이뤄진다.
■ 휴대전화 벨소리 ‘ON’…“비밀보장 꼭”
특화상담소가 많지 않다보니, 한그루 활동가의 하루는 빈틈없이 촘촘하게 흘러간다. 피해자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놓칠새라, 그는 상담소의 휴대전화를 늘 ‘벨소리’ 모드로 해둔 채 꼭 곁에 둔다. 외근을 나갈 때면 상담용 휴대전화를 자신의 번호로 착신 전환해 둔다.
출근한 지 30분쯤 지났을 무렵, 전화 상담이 들어왔다. 청소년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전화를 한 건 이날이 처음이다. 아이는 ‘휴대전화로 성적 불쾌감을 주는 글과 영상을 받았다’고 했다. 최근 들어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당했다며 상담을 신청해오는 청소년이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해 10명 중 2.8명 수준이었던 청소년 피해자는, 올 들어선 4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3.2명 수준으로 늘었다. “청소년 피해자들이 상담소에 연락할 때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부모님과 학교에 알려지는 것”이다. 한그루 활동가는 “상담할 때 비밀 보장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한그루 활동가는 자세한 얘기는 오후에 하자며 상담시간을 오후로 잡았다. 오전에는 또다른 피해자가 변호사와 법률상담하는 자리에 함께 가기로 약속을 잡아뒀기 때문이다. 법률상담 전, 변호사에게 피해자의 진술서를 미리 보내놨다. 피해자를 만나선, 변호사가 피해자에게 물어볼 수 있는 예상 질문 리스트를 뽑아 주고 상담과정을 설명했다.
상담원의 역할은, 피해자가 법률상담을 받을 때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어려운 법률 용어가 오가는 변호사와의 만남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로 한껏 위축된 피해자를 더 주눅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힘들어하면 잠시 심호흡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하고, 천천히 생각해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함께 있어 주는 것”, 그는 피해자에게 ‘내 편이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상담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했다.
법률 상담은 1시간 여 만에 끝났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상담소로 돌아온 한그루 활동가에겐 피해자에 대한 주거·취업지원 제도 안내, 피해자들과의 모바일 메신저 상담이 기다리고 있다. “피해자 상담은 보통 2시간 안팎, 주로 전화상담이 많은데, 한번 전화기를 붙들면 보통 1시간”이 훌쩍 간다. 메신저 상담을 끝내고 상담일지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덧 오전에 통화했던 청소년 피해자와의 상담 시간이었다.
“특화상담소로 지정된 뒤 연락해오는 피해자가 많아져 할 일도 늘었다”고 한그루 활동가가 말했다. 지난해 전주성폭력상담소가 지원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는 80명으로, 전년보다 30명이나 늘었다. 피해영상물(불법촬영물, 성착취물, 허위영상물 등) 삭제 등 지원 건수도 660건에서 1403건으로 2배 넘게 증가했다.
■ 지역의 피해자 연대 단 ‘2명’
상담원들의 업무는 개별 피해자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가해자가 기소된 사건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재판 방청을 하고, 지역 내 다른 기관과 간담회도 해야 한다. 디지털 성폭력 근절을 위한 캠페인 기획과 홍보물 제작, 예방교육안 작성, 특화상담소 지원 실적 정리와 재무회계 관리도 모두 특화상담소 상담원들의 업무다. 이 모든 업무를 고작 상담원 2명이 담당하고 있다.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건 과도한 업무만은 아니다. 때때로 떠오르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들의 피로도를 높인다. 특히 피해영상물과의 싸움에선 매번 지는 느낌이다. 피해영상물은 한 번 유포되면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피해영상물을 퍼뜨린 사람뿐만 아니라 이를 시청하는 사람까지 고려하면 가해자는 불특정 다수로 불어난다. 한그루 활동가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모든 피해영상물을 삭제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무력감이 크다”고 말했다.
전주/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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