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부가 자초한 CFD 피해자 코스프레

문수빈 기자 2023. 6. 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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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投刺). 던질 ‘투’에 재물 ‘자’를 쓰는 투자는 돈을 던진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주식 시장에 기꺼이 자기 재산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단돈 1원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다. 결국 그 행위의 본질은 자산 증식에 대한 욕심이다. 이 때문에 모든 투자의 제1원칙은 ‘자기 책임’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돈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 창구에서 시작된 매물 폭탄에 8개 종목(다올투자증권·다우데이타·대성홀딩스·삼천리·서울가스·선광·세방·하림지주)이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자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라덕연 호안투자컨설팅 대표 일당이 돈을 불려준다는 소식에 혹해 신분증과 본인 명의의 은행 계좌 등을 남에게 줘놓고 결국엔 돈을 잃었으니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대로면 코스피 지수가 1500포인트(p) 밑으로 떨어져 대다수의 투자자가 마이너스를 시현했던 2020년 3월은 개인 투자자가 아니라, 피해자 1000만 시대였다.

주가 조작을 까맣게 몰랐던 8개 기업 주주 역시 피해자로 인정하긴 어렵다. 대성홀딩스는 주가 폭락 직전까지 3년 동안 1234.36% 올랐다. 가장 적게 올랐던 다올투자증권은 같은 기간 130.22% 상승했다. 코스피 지수 상승률(35.38%)과 비교했을 때 문제의 8개 종목은 시장보다 적게는 3.6배 많게는 34.8배 크게 오른 것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해당 종목이 고평가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실제 유튜브 채널 ‘설명왕 테이버’를 운영하는 김태형 씨는 1월 20일 다우데이타, 삼천리, 선광, 대성홀딩스, 세방 등 5개 종목의 주가가 뚜렷한 이유 없이 과열됐다고 방송한 바 있다. 즉 주가 조작 일당과 상관 없이 해당 종목에 순수하게 투자한 사람들은 밸류에이션을 잘못 판단한 사람이지, 피해자가 아닌 셈이다.

정부에서도 이들을 ‘피해자’라고 명하는 데에 경계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관계기관 합동 차액결제거래(CFD) 규제 보완방안 발표 자리에서 한 기자가 “피해자들이 증권사의 채권 추심을 잠시 중지해달라는 요청이 있다”라고 말하자, 담당 금융위원회 과장은 “(증권사와 투자자 등) 당사자 간 문제”라면서도 ‘피해자’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오히려 ‘손실자’라는 표현을 썼다. 투자자들이 불법 가능성을 인지했을 수 있는 데다가 기본적으로 투자책임이 본인에게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정부는 향후 대책과 관련해 물음표가 남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날 발표에서 금융위는 투자 문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개인 전문 투자자 보호’ 방안을 내놨는데, 이는 본래의 제도 취지에 맞지 않는다. 전문 투자자 제도는 금융투자상품에 대한 전문성 또는 투자 위험에 따른 감수 여력이 있기 때문에 일반 투자자와 분리하는 게 핵심이다. 이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는 “전문 투자자는 요건을 따서 지정받은 사람들”이라며 “이들을 지정하는 이유는 금융당국의 바운더리 밖에서 투자해도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문 투자자를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뜻에서다.

일각에서는 금융위의 ‘전문 투자자 보호’에 투자자를 보호하는 안은 시가보다 높은 호가만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직방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그만큼 ‘전문 투자자 보호’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은 돈을 던지겠다는 사람 앞에 가서 막고 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돈을 던질 곳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곳에 던지면 최대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위험이, 저곳에 던지면 원금 손실은 물론 빚까지 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정부가 정책의 방향을 ‘보호’로 설정했으니 피해를 주장하는 투자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책임하에 하는 투자에서 ‘피해’와 ‘투자자’라는 단어가 동시에 쓰이게 한 건 정부가 빚어낸 아이러니다. 이같은 역설을 해소하려면 정책 방향은 ‘보호’가 아니라 ‘고지’에 가까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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