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컨 美 국무 사우디 날아간 날, PGA-LIV ‘골프 전쟁’ 끝났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3. 6. 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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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살해, 트럼프와 밀착으로 바이든에 미움받던 사우디
국제유가 급등, 중국의 중동 영향력 확대에 갑을구도 바뀌어
바이든, 43세 연하 빈살만에 매달렸으나 푸대접
911 테러 유족들은 “테러 배후 사우디와 손잡다니.. PGA의 배신” 분노
지난 5월 미국 버지니아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소유 트럼프내셔널골프클럽에서 열린 LIV골프 대회에서 선수들이 우승자 축하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습. 미 프로골프투어는 지난 4월부터 극한 갈등을 벌이던 LIV 측과 합병 논의를 극비리에 진행, 지난 6일 합병을 전격 선언했다. '사실상 사우디가 외교와 골프 모두에서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AP 연합뉴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의 후원을 받는 리브(LIV)골프가 합병을 선언한 6일(현지시각)은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사우디 공식 방문 일정을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바로 전날 블링컨 장관이 “(미국의 중동 최대 동맹인)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겠다”면서 중동에서의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겠다고 공개 선언하자마자, 미국과 사우디의 ‘골프 전쟁’이 극적으로 끝난 것이다.

이날 두 개의 장면은 이번 PGA와 LIV 간 합병 선언이 스포츠계의 이벤트를 넘어 얼마나 큰 국제정치적 무게를 지니는지를 보여준다. 그간 PGA와 LIV의 갈등은 미국 바이든 정부와 사우디 왕실과의 갈등을 그대로 반영한 만큼, 이번 합병 선언에도 바이든 정부의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특히 미국과 사우디가 등을 돌린 지난 2~3년간 그 빈틈을 파고든 중국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한 데 놀란 미국이 외교 노선을 180도 바꾼 상징적 장면으로 꼽힐 전망이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7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회담하고 있다. 블링컨 장관은 이번 방문에서 사우디 지도층을 만나 수단·예멘의 분쟁 종식, 이슬람국가(IS) 퇴치, 이스라엘·아랍국가 관계 정상화 등을 논의할 전망이다./AFP 연합뉴스

미-사우디 갈등과 ‘골프 전쟁’ 발단은 미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하던 사우디의 반체제 성향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2018년 터키에서 사우디 정보요원들에게 잔인하게 암살당한 일이다. 이는 미국과 사우디의 전통적 동맹 관계 물밑에서 사우디가 ‘딴 생각’을 한다는 미 외교가의 오래된 의심과 함께, 30대 새 지도자 빈살만의 자국 내 인권 탄압 논란을 주시하던 미 언론계와 진보 진영의 회의에 불을 붙인 사건이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현장 조사로 ‘몸통’으로 빈살만 왕세자라는 점이 지목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빈살만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공식 면죄부를 줬다.

반(反)트럼프 기치를 내걸고 2020년 대선에 출마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빈살만을 “살인자”로 부르며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바이든이 중동 맹주인 사우디를 몰아붙일 수 있었던 기저엔 그가 내건 인권 증진, 그리고 탈(脫)석유·친환경 에너지 정책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했다. 오바마 정부 때 성사됐다 깨진 이란 핵협상을 회생시키면, 굳이 사우디에 의존하지 않아도 중동 안보를 미국이 관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지난해 자신 소유의 뉴저지 베드민스터 골프장에서 열린 LIV 골프대회 프로암 경기에서 선수들과 포즈를 취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P 연합뉴스

그런데 바이든 정부 출범 직후 사우디가 LIV 골프를 띄워 미 특급 선수들을 끌어들이자 불똥이 스포츠계로 옮겨붙었다. 미 여론주도층은 LIV 골프를 빈살만의 ‘스포츠 워싱(sportsh washing·스포츠 열기를 내세워 인권 유린 같은 부정적 평판을 세탁하는 것)’의 전형적 사례로 비판했다. PGA도 LIV의 천문학적 자금 공격에 고사당할 두려움 속에 ‘돈이냐 정의냐’의 논란에 올라타, LIV 참여 선수들의 PGA 출전을 금지하는 식으로 선수들을 줄세웠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LIV 경기를 본인 소유 골프장에 잇따라 유치한 것도 진보 진영의 공격 소재가 됐다. 바이든 정부는 LIV를 단순 스포츠 조직이 아니라 외국요원관리법(FARA)의 적용을 받는 외국 로비집단으로 보고 감시했다.

이 와중에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석유·가스 등 에너지값이 치솟으며 미국이 40년만의 최악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경제 실패론’이 커지자, 바이든 정부는 국내 물가 안정을 위해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에 원유 증산 요청을 했다. 그러나 사우디는 되레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을 주도했다.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사우디에 날아가 43세 어린 빈살만을 만나고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면책권을 인정하겠다”고까지 읍소했지만 사실상 무시당했다. 중동 관련 비장의 무기였던 이란 핵협상은 공전됐다.

지난 2022년 12월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중국·아랍국가 정상회의에 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악수하고 있다. 중국과 사우디의 밀착은 미국을 크게 긴장시키고 바이든 정부의 외교 노선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타가 됐다. / AFP 연합뉴스

결정타는 미국의 최대 숙적인 중국과 사우디의 밀착이었다. 지난 3월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는 앙숙이었던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7년만에 정상화했다. 시진핑 중 국가주석이 지난해 12월 빈살만을 만나 38조원 규모의 투자협정을 맺은 장면도 바이든 정부를 긴장케 했다. 여전히 미국 방산수출의 최대 수입국은 사우디다. 세계 2차 대전 이래 중동 안보와 경제 질서를 정하는 단일 패권국이었던 미국으로선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긴 격이 됐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PGA와 LIV의 합병을 두고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은 “사실상 사우디의 정치적 승리”라고 보고 있다. 양국 간 화해, 관계진전이란 평도 나오지만 부정적 뉘앙스가 좀더 많다. 미국 내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2001년 9·11 테러의 숨은 배후가 사우디라고 보고 LIV를 보이콧해온 9·11 유족들은 “PGA가 우릴 배신했다”고 분노하고 있다. 한편 미 당국은 PGA와 LIV의 합병이 시장 반독점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보고 조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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