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2023] (2) 성균관대 박종하 “큰 무대서 뛰고 싶은 마음 간절해”

정다혜 2023. 6. 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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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들의 美생을 위해’ 2023 KBL 신인드래프트를 빛낼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점프볼=정다혜 인터넷기자] 두 번째 미생은 성균관대 박종하(G, 187cm)다. 성균관대 슈터로 맹활약 중인 박종하의 농구 인생을 들여다보자.

#처음 느껴본 벽, 그리고 MVP
박종하는 농구선수 출신인 아버지(박상욱 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가 운영했던 스포츠 센터에서 농구, 축구, 수영 등 경험해본 그는 농구에 재미뿐만 아니라 소질이 있음을 깨닫고 7살 때부터 유소년 농구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당시엔 이웃집과 연이 닿아 스피드 스케이팅을 맛보긴 했지만, 이는 취미에 그쳤다. 이후 박종하는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그렇게 본격적인 농구 인생은 초등학교 3학년 말미 성남초로 전학을 가면서 시작됐다.

처음은 수월한 듯 보였다. 전학 후 곧바로 동계훈련을 소화했고 다음 해부터 바로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고비가 찾아왔다. 유소년 농구를 할 당시엔 또래 사이에서 유망한 선수로 꼽혔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마자 벽을 느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무리에선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못 하다 보니까 정식 경기 작전타임 때 운 적이 있어요. 상대 팀 형들도 엄청 크고 다 잘해서 제가 뭘 해도 다 막히더라고요. ‘엘리트의 벽이 높구나’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종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땐 그만둔다고 말한 적도 있고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겨내는 길은 운동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험난했던 길을 모두 극복한 박종하는 6학년 때 열린 제42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남초부 최우수선수상의 주인공이 됐다.

#아쉬움 속에서 깨달음을 얻다
그는 6학년 끝자락에 홍대부중 진학을 위해 삼선초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이번엔 운동이 아닌 또 다른 고비가 그를 괴롭혔다. 기숙사 생활이 불가능했던 홍대부중에서 본가인 성남까지 왕복 4시간이 걸렸던 것. 친동생이 성남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기에 서울로 이사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박종하는 홍대부중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뒤 안양 호계중으로 향했다.

그가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긴 점이 있다면 중학교 3학년 때 우승을 해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기록은 계속해서 써 내려갔다. 두 자릿수 득점은 기본이었고 제41회 협회장기 전국남녀중고 농구대회 남중부 예선전 전주남중 상대로는 더블더블(35점 10리바운드 2어시스트 5스틸)을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6 연맹회장기 전국남녀중고 농구대회 남중부 예선전 광주 문화중 상대로는 44점을 폭발시키며 주목받기도 했다. 그렇게 대기록을 남긴 뒤 그는 고등학생이 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는 컸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그해 4월에 열린 제42회 협회장기 전국남녀중고 농구대회 남고부 결승전에서 군산고 상대로는 극적인 역전 득점을 올리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 기세가 한풀 꺾이는 순간이 있었다. 그동안 큰 부상이 없었던 그가 발목부상을 당한 것. 1학년 12월, 대학교와 연습경기를 치르는 도중 레이업 과정서 발을 밟혀 인대가 끊어졌다. 재활은 3개월이 걸렸지만, 정신적으로 이겨내기까진 반년이 걸렸다고.

“겨울방학 때 농구적으로 성장해서 실력도 많이 늘고 있는 상태였어요. 다음 시즌이 기대될 정도로 팀 내에서 역할도 주어졌었는데 그러던 와중 부상을 당해서 스스로 안타깝고 힘들었죠. 복귀 후 게임을 뛰었을 땐 3점슛을 13개 정도 쐈는데 하나도 못 넣었어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복귀하긴 했지만, 슬럼프 같은 것도 오고 그랬습니다.”

2학년 마지막 대회가 돼서야 이전의 기량을 되찾은 박종하는 다음 해 안양고 주장을 맡게 됐다. 주장을 맡은 만큼 책임감도 커졌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싶었지만, 그해 안양고는 준우승만 세 번을 기록했다.

첫 번째, 제56회 춘계전국남녀중고농구 연맹전 남고부 결승전에선 홍대부고 상대로 우승을 내줬다. 시즌 시작 전부터 안양고와 함께 우승 후보로 꼽혔던 학교였기에 아쉬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각 2019 연맹회장기, 제100회 전국체전이었는데 모두 결승에서 무룡고 상대로 패배했다. 박종하는 “홍대부고는 무룡고를 이기고 우리는 홍대부고를 이기는데 무룡고한테 지는 그런 게 있었어요. 졸업 전인 3학년 때 우승 한 번 하고 졸업하고 싶었는데…”라며 과거를 돌이켰다.

세 번의 준우승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 속에서 깨달음도 함께 남았다. “마음가짐의 차이, 우리 팀도 우승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상대 팀보다 부족했던 거 같아요. 그런 부분에서 마인드 차이를 느꼈습니다.”

#불안했던 첫걸음부터 팀 에이스로 자리 잡기까지
푸르른 10대를 뒤로하고 성균관대에 입학한 박종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가 있듯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차이가 존재했다. 그가 고전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수비였다. 수비보단 공격이 장점인 박종하에게 성균관대 특유의 압박 수비는 시험대였다.

“성균관대가 원래 40분 내내 프레스를 쓰니까 연습경기를 하면 제 별명이 3분 카레였어요(웃음). 수비하느라 바빠서 잘하는 공격도 못 하겠더라고요. 1학년 땐 너무 힘들어서 적응을 잘 못 했어요.”

또한, 수비 적응을 마치기도 전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제대로 된 대회도 치르지 못했다. 대학리그 개막은 10월로 미뤄졌고 이마저도 1, 2차 대회로 나눠 진행됐다. 운동하는 시간보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코로나19 팬데믹과 팀 상황으로 인해 2학년 때까지 출전시간이 길지 않았던 박종하는 3학년 동계훈련 당시 마음가짐이 달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코트 위에서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3학년 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긴장 반 설렘 반이었어요. 첫 대회 홈에서 경기를 치르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또 관중분들도 계셨어요. 첫 대회 때 잘해서 수훈선수 인터뷰도 하고 그때 이후로 자신감이 붙어서 기회를 잘 잡았던 거 같습니다.”

박종하는 2022 KUSF 대학농구 U-리그 마지막 경기(경희대전)에서 3점슛 4개 포함 20점을 올리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평균 득점 16.4점을 기록했다. 졸업을 앞둔 올 시즌도 순항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4년 만에 열렸던 제46회 한·일 대학선발 농구대회에 발탁되어 코트를 밟고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졸업 전에 태극마크를 달 수 있어서 뜻깊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자부심도 생기고 자신감도 많이 얻었습니다. 새로운 감독님과 새로운 농구 스타일을 펼쳐야 했는데 프로에서 경험해야 할 거 미리 경험해본 거 같고 값진 추억인 거 같아요.”

#환호성의 주인공을 꿈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종하는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에서 농구를 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 마찬가지로 프로 진출 시 이 부분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한·일 농구대회에서 느낀 게 관중분들이 꽉 차고 많아서 너무 재밌더라고요. 아무래도 프로는 대학보다 관중분들이 많고 경기장도 크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설레고 그런 코트에서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듭니다.”

보다 더 큰 무대에서 성장과 함성을 느끼고픈 박종하는 다부진 각오도 남겼다. “프로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까 어느 팀에 가든 빨리 뛰어보고 싶어요. 뽑아주시면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러 번의 시련을 마주쳤지만, 꿋꿋이 길을 찾아 나선 박종하. 과연 그는 프로로 향하기 위해, 함성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드래프트라는 등용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사진_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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