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환의 중국은, 왜] #111 디리스킹?...中, 발끈한 이유

정용환 기자 2023. 6. 7.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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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등 핵심 기술 대중 봉쇄
美,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
EUㆍ미 기업인들 “디리스킹” 강조
中 “술병 바뀐다고 술 바뀌나” 분개
〈사진= USCHINA포커스닷컴 캡처〉
화웨이에 대한 최신 반도체칩 공급 중단, EUV 첨단 노광장비 대중 수출 차단, 엔비디아의 AI용 최첨단 칩 대중 판매 불가, 일본의 광학 장비 중국 수출 중단….

지난 2년간 중국을 상대로 미국이 주도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포석들입니다. 하나같이 중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급소만 찾아서 가한 타격들입니다.

〈사진= 셔터스톡〉
미ㆍ중 디커플링이 얼마나 살벌하고 가차 없는 것인지, 비정한 지정학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조치들이었습니다.

디커플링의 한류가 풍랑을 일으키는 시대에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정체 모를 조류가 흘러들어왔습니다. 이른바 '디리스킹(위험 관리, 위험 회피)' 입니다.

미ㆍ중 간에 용어를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졌습니다. 양국 외교 당국이 이 용어를 둘러싸고 대립하자 그간 감정을 눌러왔던 중국공산당 선전부 매체도 가세했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디커플링과 디리스킹. 말에는 화자의 의도와 철학, 관점, 접근법이 녹아 있게 마련입니다. 두 용어가 미ㆍ중 갈등이라는 시대의 화두 앞으로 소환된 논리 구조부터 따져볼까요.

우선 디커플링. 잘 아시다시피 디커플링이 부각된 건 미국 트럼프 대통령 때입니다.

'중국제조 2025'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총력전 양상으로 추진하자 맞대응 카드로 나온 겁니다.

당시 시진핑 주석, 웅대한 꿈을 꿨습니다. '중국제조 2025'는 여러 하이테크 기술을 거론했지만 중추는 반도체였습니다. 반도체 기술 자립을 위해 180조원이 넘는 자금력을 뒷받침하기 시작했고 필요하면 더 쏟아부을 기세였습니다.

시진핑이 2018년 4월 우한의 칭화유니그룹 산하 메모리 공장에서 했던 말입니다. 길게 한 얘길 다 되감을 건 없고 핵심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반도체는 제조업의 심장으로, 심장이 약하면 아무리 덩치가 커도 강하다 할 수 없다. 반도체 분야에서 중대 돌파를 이뤄내 세계 메모리 반도체 기술의 최고봉에 올라서야 한다.”

돌파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표에 도달하고 말겠다는 절박함이 감지됩니다. 자금력과 시장을 바탕으로 미흡한 기술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었죠.

중국 반도체 진영은 거침 없이 전진했습니다. 490억 달러에 이르는 국가반도체기금 지원을 업고 해외의 기술 기업을 공격적으로 사들였습니다. 한때 마이크론을 사겠다고 호언을 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기업, 파운드리 거인 대만의 TSMC도 살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디커플링 진영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반도체의 기술 자립에 결정적인 급소를 치기 시작했고 꼭 가야 하는 길목을 막아섰습니다. 지난 2년간 취해진 조치들을 되짚어보면 뭔가 숨통을 조이는 압박감이 디커플링을 둘러싼 주요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하다고 봤는지 대응 조치를 너무 급하게, 심하게 치고 나간 거 같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냉전 붕괴 이후 30년 넘게 구축한 글로벌 공급망이 반도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스마트폰, 자동차, 금융 상품까지 가치 사슬이 촘촘하게 깔려 한두 해에 걷어내는 게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비즈니스는 더 해야 하는데 미ㆍ중이 군사 지정학적 전략 경쟁자로 대립하고 갈등하면 씨줄 날줄처럼 엮인 비즈니스에 안 좋습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선이 다른 공급망으로 빠르게 옮겨가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지난달 31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상하이 기가팩토리를 방문해 중국인 직원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중국 웨이보 캡처]〈사진= 웨이보 캡처〉
요즘 미국과 유럽 기업의 CEO들이 분주하게 베이징을 들락거립니다. 애플의 팀 쿡 CEO,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회장 등 면모가 화려합니다. 루이뷔통의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도 이달 말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중국은 찾은 기업가들은 거칠고 난폭한 이미지를 주는 디커플링에 반대하는 입장도 공개 천명합니다. AI 전용 칩을 파는 엠비디아 젠슨 황 대표도 디커플링은 안 된다고 립서비스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디리스킹이 등장합니다. 지난 3월이었습니다.

3월 30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방중했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썼습니다. 방중 당시 폰데어라이엔은 “중국으로부터 디커플링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유럽의 이익에 들어맞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새 용어를 데뷔시킵니다.

'디커플링'은 거친 탈중국 조치들과 맞물려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배제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면 '디리스킹'은 중국발 위험 요인 제거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디커플링의 공세적인 이미지와 차별화를 강조합니다.

디커플링 진영에서 이런 개념 분화가 일어나면 그 틈새를 중국이 파고들게 마련입니다. 한 달이 못 되는 시간 동안 미국과 EU 사이에 어떤 논쟁이 오갔는지 모르겠으나 한 방향으로 용어 통일에 들어갑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사진= AP, 연합뉴스〉
미국은 EU와의 갈등으로 인한 누수 부담 때문인지 내용이야 어떻든 형식상 보조를 같이합니다. 지난 4월 27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공개 석상에서 디리스킹을 떠받칩니다.

급기야 바이든 대통령도 디리스킹의 손을 들어줍니다. 히로시마 G7 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도 디리스킹을 강조합니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설리번 안보보좌관은 4일 CNN에 나와 디리스킹에 대해 용어 정리를 해줍니다. 설리번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첫째, 청정에너지 기술이나 반도체 등 핵심 분야에서 탄력적인 공급망을 확보해 한 국가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

둘째, 군사 용도로 사용되는 최첨단 기술을 보호하는 것.

셋째, 국내 산업 원천에 근본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

설리번은 “경제, 기술 분야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과 그 경쟁이 갈등이나 대립으로 치닫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 모순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달 30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스웨덴 룰레오에서 열린 미-EU 무역기술협의회(TTC) 참석차 룰레오 공항에 도착해 영접받고 있다.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여러분 보기엔 어떻습니까. 설리번이 말하는 디리스킹이 디커플링과 다른가요. 세 가지 중 특히 둘째 이유인 경제·안보적 논리로 현재 대중 첨단 반도체 금수와 제재가 가해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히로시마 G7 회의에서도 디리스킹의 정의를 아리송하게 하는 합의가 나왔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해 공동 대처하기로 천명했는데요. 중국이 호주나 우리나라에 대해 경제적 강압 조치를 취했을 때 각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공동 대응을 제도화하기로 한 겁니다. 디리스킹이 중국 속박이 아니고 뭐냐는 (중국의) 볼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런 점에서 말로는 디리스킹이라고 하는데 의미는 사실상 디커플링과 어떤 면에서 다른 건지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현실은 디커플링스럽습니다. 지난해 미국이 아시아 국가(한국, 일본 제외)로부터 수입한 제조품 중 중국산은 50.7%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10년 전인 2013년에 비해 70% 가까이 감소한 수치라고 하는군요(글로벌 투자컨설팅 기업 '커니' 보고서).

해외 기업들의 자발적 탈출 러시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분석입니다. 추세를 보면 앞으로 중국산 비중은 50% 아래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중국은 설리번의 설명을 듣고 안도했을까요. 발끈합니다.

지난달 21일 바이든 대통령이 G7 회의를 마치고 에어포스원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 AP, 연합뉴스〉
견제와 속박을 당하는 입장에서 눈에 불이 납니다. 용어 마사지 정도로 본질이 달라지냐는 겁니다. 수사적 변화에 불과하다고 등을 돌립니다. 국책 연구기관, 당 선전매체, 외교부까지 냉소적입니다.

“중국 억제라는 전략 목표가 달라지나. 전술적 수사적 표현만 바꾼 것.”

“병을 바꾼다고 술이 바뀌나.”

“기만적이다. 중국의 기술 억제와 봉쇄라는 본질은 안 바뀐다.”

“디리스킹? 중국이 위험인가. 중국은 기회다. 진정한 위험은 신냉전, 과학기술의 정치화다.”

서방의 탈중국 조치들이 디커플링과 디리스킹으로 용어 분화가 일어나며 본질에 대한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본질은 중국의 기술 패권에 대한 도전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난달 21일 열린 G7 확대정상회의. 〈사진= AP, 연합뉴스〉
그런 점에서 다시 화두는 반도체입니다. 용어가 어떻든 반도체를 둘러싼 첨단ㆍ선단 (先端ㆍ맨앞) 기술력 전선에선 추호의 틈새도,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디커플링ㆍ디리스킹 진영의 합의입니다.

반도체 기술 전선의 동향에 우리가 눈을 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도체 기술 갈등 양상은 다음 칼럼에서 이어가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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