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 응급실 ‘표류’ 대책 4개중 3개가 재탕
‘경증환자 제한’은 5년째 제자리
지난달 31일 국민의힘과 정부는 당정 협의를 거쳐 “응급실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응급실 이용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 취재 결과 이는 2018년 12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제3차 응급의료 기본계획’에 포함된 대책이었다. 당시 복지부는 2020년부터 관련 시범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참여 기관 모집 공고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당정 대책 가운데 △수술 의사 현황 실시간 업데이트 △지역응급의료상황실 설치 등 2가지도 올해 1월 발표된 복지부의 ‘필수의료 지원대책’, 3월 발표된 ‘제4차 응급의료 기본계획’에 각각 포함됐지만 아직 실행 로드맵은 마련되지 않았다.
응급실 ‘표류’ 없애려면… “경증환자 제한 구체안 마련해야”
당정 대책 4개중 3개 ‘재탕’
경증환자엔 비싼 치료비 물리고
지역응급상황실 예산 확보 관건
이견 조율 컨트롤타워도 시급
‘중증 환자는 대형병원으로, 경증 환자는 중소병원으로.’
당연한 원칙이지만 응급실에선 정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2021년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권역·지역응급의료센터를 찾은 약 480만 명 가운데 절반(51.0%)이 경증 환자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응급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았어도 된다.
경증 환자들이 병상을 가득 채운 사이 중증 환자가 거리를 떠돈다. 올 3월 대구에서 추락 사고를 당한 뒤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숨진 17세 여학생이 그랬다. 따라서 경증 환자의 대형병원 응급실 이용을 제한하는 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대책이 여러 차례 좌절된 것에 대한 반성도, 구체적인 돌파책도 없다는 점이다. 지난달 31일 발표된 당정 대책에선 현장에서 경증 환자를 상대해야 하는 119구급대와 응급실 의료진에 대한 현실적 고려가 빠져 있다.
5년 전 ‘중증 응급환자 중심진료’ 시범사업이 좌절된 가장 큰 이유는 만에 하나 환자가 중증으로 판명되거나 상태가 악화되면 환자를 돌려보낸 법적 책임을 구급대나 의료진이 떠안을 수도 있어서다. 이 사업을 추진했던 정부 관계자는 “공고를 내지 못한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유행 탓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소방청과 병원들의 우려 때문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경증 환자가 스스로 대형병원 응급실 이용을 자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경증 환자에게는 비싼 응급 진료비를 물려야 하지만, 이런 대책도 빠져 있다. 일본에선 경증 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고도구명구급센터)을 이용하면 수십만 원의 진료비를 내는 반면, 국내에선 약 4만 원만 추가 부담한다. 양성관 의정부백병원 가정의학과장은 “정부와 정치권이 ‘인기 없는’ 대책을 펼 의향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지역응급의료상황실을 새로 설치하는 대책의 경우 예산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지역응급의료상황실은 119구급대나 응급실이 환자를 치료할 병상을 찾지 못하면 이를 대신 찾아주는 일종의 관제탑이다. 전국 6개 상황실을 신설하면 상주 인력을 5명만 잡아도 필요 인건비는 60억 원이 넘는다. 하지만 지난해 예산 당국은 기존 상황실(1개) 인력을 늘리는 예산마저 삭감했다. 권역응급의료센터 내에 수술 의료진 현황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인력도 필요하지만, 인건비를 지원하는 대책은 물론 그 방식과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번 당정 협의에 국무총리실이나 국무조정실, 기획재정부 관계자가 참석하지 않은 것만 봐도 대책 실행 의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정부 측 참석자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 남화영 소방청장뿐이었다. 한 예방의학과 교수는 “그간 수많은 응급의료 대책이 부처 간 이견과 예산 확보 실패로 좌절했는데, 이번에도 조율할 의사결정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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