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극동방송 들으며 찬송가 받아적는 북한 주민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6.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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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청취자가 극동방송에 보내온 편지. "받아적을 수 있도록 찬송가를 천천히 틀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극동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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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모았던 성경 필사본 전시회

두루마리 화장지 앞뒷면에 검정과 빨강 볼펜으로 필사(筆寫)한 성경, 팩스 용지에 두루마리처럼 적은 성경, 가로 85센티×세로 125센티에 무게 78㎏짜리로 기네스북에 오른 초대형 필사본….

지난 2014년 7월 서울 목동 CBS 사옥 전시장에서 열린 ‘한국 교회 성경필사본 전시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CBS가 그해 4월 작품 모집 공고를 냈더니 전국에서 318명이 필사 성경을 보내와 이뤄진 전시였습니다. 이색 성경 필사본들도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그 성경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쓴 정성과 사연이 더 대단했습니다. 죄 짓고 감옥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군대 간 아들의 안녕의 빌며, 사업이 잘돼서, 사업이 망해서, 몸이 아파서…. 성경을 필사한 사연은 다양했습니다. 할머니는 아빠를 위해서, 아빠는 딸을 위해서 영어성경을 3대가 이어쓴 경우도 있었고요. 당시 전시회는 관람객도 많이 모였습니다.

2014년 열린 '한국 교회 성경 필사본 전시회'. 두루마리 화장지, 팩스용지, 한지 붓글씨 등 300여종의 필사본이 선보였다. /CBS 제공

성경 필사는 한국 개신교계에서 활발하게 이어지는 전통입니다. 성경 필사용 노트도 있지요. 개인적으로 필사하기도 하고, 교회 차원에서 함께 필사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지요. 보통 구약은 140만자, 신약은 44만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모두 필사하려면 보통 3년반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다른 일 접고 필사에만 전념하면 1년만에 끝내기도 한다고 하지요. 성경을 필사하는 분들은 대개 필사하는 동안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쓰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집중하게 된다고 합니다.

김학중 꿈의교회 담임목사님은 2015년 조선일보 ‘에세이’란을 통해 교회에서 성경 필사 전시회를 연 이야기를 소개했지요. 한 교인은 한 장을 꽉 채워서 잘 필사하다가 중간에 한 자(字)가 틀렸다지요. ‘수정 테이프로 살짝 고치면 어떻겠느냐’는 권유에도 ‘어색한 흠집 남기면 안 된다’며 처음부터 새로 썼답니다. 그런 정성이 성경 필사의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집안의 가보(家寶)로 남은 성경 필사본도 많습니다.

#코로나 극복 마음 모은 ‘사경탑’

2022년 6월 서울 망우동 천태종 삼룡사 법당에서 당시 주지 무원 스님이 신도들이 코로나를 이겨내며 사경한 법화경을 넣은 '사경탑'을 소개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불교에도 ‘사경(寫經)’의 전통이 깊습니다. 불경을 베껴쓰는 것이지요. 불교 사경 작품들은 국보, 보물로 지정된 것도 많습니다. 불경 사경 역시 지극한 정성이 공통점입니다.

불경 사경 가운데 최근 기억에 남는 작품은 서울 망우동 삼룡사의 ‘사경탑(寫經塔)’입니다. 지난 2022년 6월 삼룡사 법당을 찾았을 때 천장에 닿을 듯 나무 탑이 솟아있었습니다. 그 탑 내부엔 공책이 가득 꽂혀있었습니다. 그 공책은 신도들이 법화경 등을 적은 사경 노트였고요.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 시절이었지요. 2021년 2월 삼룡사 주지로 부임한 무원 스님은 코로나 때문에 신도들 얼굴도 못 보았지요. 모여서 법회를 드리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2000여 신도들 가정으로 ‘법화경’ 등 사경노트 7권을 택배로 보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을 극복하고 기후 위기 극복, 생명 존중, 세계 평화, 남북통일 등을 기도하며 사경해달라고 부탁했지요. 신도들은 노트의 빈칸을 차곡차곡 채워나갔고, 다 쓴 사경 노트를 삼룡사로 보내왔습니다. 스님은 신도들의 사경노트를 모아 투명 유리로 된 나무탑 내부에 꽂아 전시한 것이지요. 덕분에 ‘사경탑’은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경전을 필사하며 신심으로 이겨낸 증거이자 한 시대를 보여주는 특별한 유물로 남았습니다.

#’안아운서께’ 북한 청취자가 극동방송에 보내온 편지

극동방송 청취 소감을 적은 북한 청취자의 노트. /극동방송 제공

최근 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성경과 찬송가 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의 크리스천들 이야기입니다. 새벽 시간에 극동방송을 들으며 찬송가를 받아적어 손글씨 찬송가집을 만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극동방송은 과거 냉전시대부터 북한은 물론 중공(중국)과 소련(러시아)에서도 수신이 가능하도록 강력한 전파를 쏘았습니다. 냉전 시절에는 공산 국가 주민들이 방송을 잘 듣고 있는지 확인이 안 됐는데, 1990년대부터는 피드백이 활발하답니다. 중국 동포들은 한중수교 이후 왕래가 자유로워졌고, 중국 동포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반응도 전해지곤 한답니다. 그들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북한에서도 극동방송을 청취하는 주민들이 꽤 있으며 더러는 방송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합니다. 북한 주민의 반응 가운데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님을 비롯한 직원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가 ‘받아쓰기’였답니다.

극동방송 프로그램 중엔 새벽 시간 성경과 찬송을 천천히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북한의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들으며 받아적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은 북한 청취자들이 탈북자나 중국 동포를 거쳐 극동방송에 보내온 편지에서 드러났습니다. 제가 읽은 한 편지는 “존경하시는 안아언사께”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안아언사’가 무슨 뜻인지 잠시 갸우뚱했지만 이내 ‘아나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들리는 대로 적은 것이겠지요. 이 편지에서 청취자는 “비록 방송을 듣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은밀한 가운데 곳곳에서 청취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라”라며 “찬송가를 (방송에)보낼 때 받아쓸 수 있게 1절만이라도 한 자 한 자 천천히 부를 수 없을까요?”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극동방송에선 북한 청취자들이 찬송가뿐 아니라 성경도 받아적어 책으로 만들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필사본들은 인쇄된 성경을 베껴쓰는 것이었습니다. 그 필사 성경들도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북한의 신자들에겐 베껴쓸 성경 자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받아 적어 성경과 찬송가집을 만들고 있겠지요.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받아쓰기 성경을 만드는 경우는 북한 주민들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 상태에서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찬송가를 한 글자씩 받아적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도대체 어떤 간절함이 그들을 새벽에 라디오 앞에 앉게 만들었을까요. 또한 그렇게 라디오 방송을 듣고 성경을 받아적는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니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통일이 되면 이런 ‘라디오 들으며 받아쓴 성경’ 전시회도 열리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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