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써 내는 것, 과거를 다르게 한 번 더 사는 일 같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 등 단편 7편 엮어
작품 속 인물들 관계·기억 문제로 고뇌
부조리한 현재·배타성·위선 등 꼬집어
“기억 반추하며 얻는 고통, 이젠 축복같아
들여다볼수록 미처 몰랐던 면들 보여줘”
“그런데 그렇게 큰 벌레가 도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오래전 어느 날,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 입주해 있던 한 레지던시 작가는 큰 벌레를 발견한 뒤 문화관을 관리하는 간사에게 물었다. 문화관 간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벌레는 어디로든 들어와요.”
“네 명의 친구들의 여행에 그 문답을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물들의 상황이 변하면서 그 문답도 묘하게 뉘앙스가 변하는 걸 느꼈지요. 집필 과정은 언제나 어렵지만, 이 소설에서는 네 친구들의 삶이 조금씩 훼손되고 관계가 변질되는 과정을 쓰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해 말 잡지 ‘에픽’에 네 친구의 엇갈린 관계와 기억의 문제를 예리하게 그린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을 발표했다. 리더 격인 부영과, 규칙적이고 예의바른 경애, 상냥하고 조심성 많은 정원, 술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준희 네 사람은 대학 시절 초기 같은 하숙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친밀하게 지낸다. 생활하는 곳이 달라진 뒤에도 한동안 접촉을 이어가던 이들은 정원의 갑작스런 자살과 경애의 배반으로 엉클어진다. 준희는 지난 세월을 절박하게 돌이켜보다가 삼십 년 전 넷이 함께한 여행에서 경험한 사슴벌레식 문답의 의미와 뉘앙스가 점차 바뀌어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29쪽)
소설가 권여선이 관계와 감정과 기억이라는 프리즘으로 들여다본 한 시절과 인물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정은 어디로 향해 갈까. 권 작가를 최근 이메일로 만났다.
―‘사슴벌레식 문답’ 속의 법사나 포럼, 배신 등은 부조리한 현재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도 있어 보입니다. 독자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요.
“정확히 지적해 주신 대로, 부조리한 현재에 대한 알레고리로 쓴 면이 있고, 또 시간이 주는 무서운 혼탁과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2020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실버들 천만사’는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는 반희가 어느 날 딸 채운의 전화를 받고 함께 여행을 가게 되는 이야기다. 반희는 딸과 여행을 하면서 인연의 밧줄을 꼬기로 결심하는데.
―딸 채운의 ‘미래완료형’ 인생관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은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된 것인가요.
“채운이 말하는 ‘미래완료’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고통스러운 상황이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듯이 겪는 채운의 한 증상을 표현하는 말이지요. 저는 제 세대의 여성이 엄마가 되어 딸을 키울 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습니다. 이전 세대의 엄마가 딸을 키울 때처럼 그렇게 반복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마음, 그러나 결국 그 마음 때문에 딸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는 상황에 대해 쓰고자 했습니다.”
2019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어느 성당의 여신도 모임에 일흔두 살의 마리아 부고가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신도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추모하면서 마리아를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마리아를 낮게 보는 은근한 배타성과 위선이 존재한다. 그들의 위선을 느끼던 베르타 역시 마리아의 구취로 편견을 갖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 비관한다.
―처음 마리아를 재구성하다가 나중에 추모하는 이들의 위선으로 나아가는 전환은 놀라운 풍경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어떤 경험이나 구상을 통해서 태어났나요.
“첫 생각은 파독 간호사에 대한 소설을 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파독 간호사들 중 독일에 영주하지 못하고 부득이 돌아온 경우(강제송환까지 포함해서)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미 노년이 되고 죽음이 임박한 마리아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녀의 삶이 품은 비극성에 대해 쓰게 됐습니다.”
202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기억의 왈츠’는 ‘나’가 동생 부부와 함께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찾아갔다가 삼십년 전 시절의 기억과 마주하는 설정이다. 대학원 시절 나는 또래의 경서와 만났다가 헤어지게 됐는데, 그때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위로해 주던 경서가….
―기억에 따라서 관계가 이리저리 바뀌고 부유하다가 새롭게 희망을 변해가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듯합니다. 왜 기억에 주목하시는지요.
“기억에 사로잡히는 일이 소설가의 주요한 일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게 저주인가 생각했는데, 이제는 기억이 주는 고통까지도 어쩌면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억은 우리가 한번 주조한 대로의 패턴으로 존재하지 않고,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면들을 자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쓰는 일은 과거를 다르게 한 번 더 사는 일과 같게 여겨집니다.”
1965년 안동에서 태어난 권여선은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을, 장편소설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등을 펴냈다.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 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다지 중요한 미학적 원칙이나 방법은 없고, 오로지 시간을 확보하고 배분하는 원칙만 있습니다. 써야 할 원고 매수에 맞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집필하는 것뿐입니다. 확보한 시간만큼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쓰면 어떻게든 소설이 써지게 돼 있습니다.”
매일 새벽 3시 전에 자리에 눕고, 오전 11시 전후 몸을 일으킨다. 카페에 들어가서 체력이 되는 만큼 글을 쓰거나 읽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식사는 세 끼를 챙기고, 가끔은 오래된 친구 같은 술도. 퐁당당퐁당당당, 퐁당퐁당, 퐁퐁퐁…. 그 속에 다시 새로운 계절을 지나가려는 소설가 권여선이 서 있다. 이런저런 일로 외출하고 사람을 만나는 관계의 숲에서, 다시 혼자 지내는 생활로 급하게 돌아오고 있는 그가. 그런데, 지난 시절 기억하고 반추하는 힘으로 살았다던 그가 다시 키울 새 계절의 힘은 무엇일까.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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