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독립영화만이 가진 가치가 있다
[채희숙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
<이방인들의 영화>(이도훈 지음, 갈무리, 2023)는 "어떤 영화와의 우연적인 만남"이 성사되는 "이름 없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름 없음'은 "관객의 영화적 지식이나 경험 바깥에 위치"함을 뜻하며 이름 없는 영화란 "언젠가 제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이방인과 같다. 그런데 이때 이방인을 호명하는 일은 기존 사회 내부에서 외부로, 또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일방적인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영화가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우리도 영화에게 다가가"는 "이방인의 관계"로서의 "나와 독립영화", 두 이방인'들'의 마주침에서 시작된다.
이방인으로서의 '나'는 이름 없는 영화들과의 마주침에서 "영화가 담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얻는다. 이방인 관객이 이방인 영화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정체성과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성격의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이방인들의 마주침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을 넘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운동'을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북돋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마주침을 가져오는 이름 없는 영화들의 자리에 왜 '독립영화'가 있을까? 일차적으로는 저자가 밝히듯이 그가 만난 이름 없는 영화들이 경험적으로 독립영화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적 경험은 독립영화가 상투적이거나 지배적인 기존의 것을 넘어서 어떤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힘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것의 바깥을 의미하는 ‘이름 없음’은 독립영화의 조건이자 숙명과도 같다.
이처럼 이 책의 두 이방인들은 또 다른 세계를 믿고 나아가는 운동, 그 서로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운동과 함께 규정될 수 있다.
저자는 현재의 독립영화가 "자신의 이름을 완성하기 위해 관객을 호명"하고 있으나 "독립영화 '작품'에 대한 관심에 비해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적은" 현실을 지적한다. 양적인 지표에 치우쳐 독립영화의 성과를 매기는 상영 문화에서 위와 같은 이방인들의 마주침은 후순위로 밀리고 잊혀가고 있으며, 그렇게 "독립영화의 이름이 사라지고, 독립영화의 경험이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는 영화 문화에 "독립영화의 이름과 그것에 결부된 경험의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찾고자 하는 독립영화의 이름은 크게 두 가지 일에서 모색된다. 하나는 근대에 탄생한 영화 매체 고유의 성격에서 표현되는 현대적 삶의 근간을 포착하고, 그 조건과 문제를 체계화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매체 실험이나 대안적 미디어 활동 속에서 구성되는 미학과 그 감각적 현실의 대항성을 밝히는 일이다.
물론 지배적인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저항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주요 동력으로 익히 언급되어 왔으나, 저자는 "한국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사회변혁으로서의 영화운동으로 한정"해온 기존 영화사 담론이 독립영화의 독자적인 문제 구성과 계보를 풍부하게 보는 데에 한계로 작용해온 점을 문제 삼고 독립영화 담론의 확장을 꾀한다. (저자는 자신의 독립영화 경험과 그 이론적 전개에 극영화가 다소 배제되어 있음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본문의 전개가 독립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은 한국의 독립극영화가 독립다큐멘터리영화에 비해 빠르게 영화시장의 한 영역으로 흡수 소화되고 있는 조건에 기인한다. 필자 주.)
구체적으로 보면 1장에서 4장까지는 독립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특정 경향들을 선별 및 분류하고 특정 영화이론 내지는 인문·사회학을 경유하여 그 경향의 계보를 확장하는 가운데 독립영화들의 물음을 전면화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1장에서 독립영화는 도시교향곡 영화와 접속된다. 도시교향곡은 1920년대에 나타난 두 영화사적 흐름, 즉 아방가르드 영화운동과 근대 대도시의 삶의 양식에서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 및 형식을 찾은 경향에서 형성되었다. 저자는 1960~70년대 초창기 한국 독립영화들이 도시교향곡의 실험성과 비판적 탐구의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한국 독립영화의 미학적 가능성과 정치적 비전을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1장이 독립영화의 기원에 관한 역사 서술에 도전한다면, 2장은 대안적 미디어로서의 한국 독립영화의 저항성에 대해 성찰한다. 저자는 최근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상당수가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도시 전유를 고찰하고 있다며 "도시를 다르게 감각하고, 도시를 다르게 사유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를 일종의 저항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한다.
1장과 2장은 현대적 삶의 모순이 응집된 도시에 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독립다큐멘터리들을 중심으로,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운동의 단순 반영을 넘어서 독자적인 비판 미학을 구축해온 바를 제시한다.
3장은 크라카우어가 역사와 사진적 매체의 친연성을 고찰한 내용을 따라가면서 한국다큐멘터리가 "위로부터의 역사 쓰기에 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에 천착해왔음을 주목한다.
4장에서 현장은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이자 그 사건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규정되며, 이어서 전자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면서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경향에서 후자와 같이 사건의 공론화를 통해 "심리적으로 개입"하는 경향으로 확장되어 온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현장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3장과 4장에 걸쳐서는 3장 제목처럼 지배적인 사회 흐름에 대항하는 한국 독립영화의 "한판 내기"들이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반부 1장에서 4장까지 이어지는 글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작품과 문제의식 속에 독립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글들은 대항담론의 이차적 '반영'으로 축소되어 온 독립영화사에 대한 그간의 이해를 성찰하고 독립영화를 비판적인 영화사의 내적 운동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으로, 또 한국 독립영화가 그러한 독자적인 흐름 속에서 다른 여러 대항적 흐름과 마주치면서 사유를 이어온 것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어 있다.
후반부에서는 작품 분석을 중심으로 독립영화 고유의 비판적 흐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는 노력이 이어진다. 5장에서 7장까지는 몇몇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면서 현대 독립다큐멘터리들이 설정하고 있는 문제를 소개하고 그와 대결하는 영화들의 실험이 지닌 역량을 진단한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그간 전개되어온 에세이영화 이론을 정리 및 소개한다. 이 후반부와 부록까지의 글들은 근래 전개되고 있는 디지털 시네마 환경에서의 영화 담론에 한국 독립영화가 응답하는 바를 보여주고 있다.
<이방인들의 영화>는 특정한 경향의 등장을 바삐 포착하고 부지런히 응답해온 연구자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 소개된 글들은 각각이 그간의 한국 독립영화들에 반응하고 그것들을 잇고 북돋는 작업으로 독립영화 담론에 기여해왔다.
서두에 이방인'들'의 마주침에서 이름을 찾는 일이 시작된다고 한 것처럼 그의 작업은 독립영화의 어떤 등장을 그 하나로 고립시키지 않고 미학적·역사적·사회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이방인들의 마주침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들이다.
독립영화의 이름을 호명하는 일은 그 이름 없음의 성격을 보전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독립영화를 어떤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장르화한다면 그것은 이내 이방인으로서의 독립영화가 추동하는 영화적 경험의 역량을 잃고 말 것이다.
독립영화가 본연의 운동성 속에서 호명되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이방인, 즉 이름 없는 영화와의 마주침에서 다른 세계를 향한 동력을 얻는 그 운동하는 관객, 그 이방인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틀로 귀속될 위치에 대기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계속되는 이방인'들'과의 마주침에서 힘을 얻고 나아가는 독립영화를, 그리고 그러한 이방인들의 마주침을 사유하는 저자의 계속되는 성실한 연구를 응원한다.
[채희숙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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