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집주인’을 너무 모른다

전슬기 2023. 6. 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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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그래픽_김승미

[한겨레 프리즘] 전슬기 | 금융팀장

지난해 봄, 곧 임기 종료를 앞둔 금융 쪽 한 고위관료는 식사 자리에서 전세대출 제도를 손대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는 얘기를 꺼냈다. 집값 상승, 가계부채 증가 등을 부추기는 전세제도의 부작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우려였다. 그러나 그 고위관료도 기자도, 부작용을 우려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제도 개편이 난제라는 점 역시 알고 있었다. 전세제도가 서민의 주거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식사 자리가 끝났고, 그로부터 1년여 뒤 전국 곳곳에서 전세사기로 안타까운 목숨까지 잃은 피해자들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전세제도가 발달한 배경엔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이익을 보는 구조가 존재한다. 집주인 처지에선 본인 소유 주택을 빌려주는 대신 집값의 50~80%에 달하는 큰 규모의 자금(전세보증금)을 단번에 조달할 수 있다. 세입자도 월세보다 낮은 비용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주택을 소유하면서 생기는 가격변동 위험 등을 회피할 수 있다. 세입자는 보증금의 70~90%까지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이 구조를 쉽게 풀어보면, 전세제도는 사실상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돈(보증금)을 빌려주는 사적 거래와 유사하다. 또한 세입자가 전세자금 대출을 받는다면 이는 집주인이 임차인을 통해 금융회사로부터 대출을 받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가령 기자가 사는 집은 전세보증금이 3억원이며, 보증금의 80%인 2억4천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이는 기자가 집을 이용하는 대신 2년간 집주인에게 3억원을 빌려주는 것과 같으며, 동시에 은행은 기자를 통해 집주인에게 2억4천만원을 대출해주는 것이다.

결국 세입자와 금융기관이 집을 담보로 집주인에게 수억원대 돈을 빌려주는 구조인 셈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처럼 큰돈이 오가는 거래임에도 우리는 의외로 집주인에 관해 너무 모르고 있다. 보통 돈을 빌려줄 때는 그 사람의 소득, 신용점수, 과거 연체 이력 등 다양한 개인정보를 살펴보면서 상환 능력을 따져보게 된다. 하지만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빌려주면서도 그의 신용 상태, 연체 이력, 다른 주택 보유에 따른 자산가치 변동 위험 노출 등 향후 나의 돈을 돌려줄 능력이 있는지 사전에 충분히 점검하기 힘들다. 주택 담보 설정 상황이나 채권 순위 등을 확인하고 확정일자를 받아두는 것이 그나마 세입자가 할 수 있는 사전 대비의 전부다.

금융기관도 집주인을 잘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세자금 대출은 세입자를 거쳐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구조인데, 금융기관 입장에선 대부분 보증기관이 껴 있으므로 심사를 깐깐히 할 유인이 적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보증기관이 대신 갚아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전세제도의 허점은 사실상 거액의 돈을 세입자로부터 혹은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려가는 집주인에 대해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세계약은 집주인이 계약 만료 때 새로운 임차인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보증금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라는 위험한 가정에 기반을 둔 돈거래가 되고 있다.

정부는 전세제도 전반을 재점검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전세제도를 당장 폐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전세계약이 끝난 기자도 60만~100만원 월세 내는 집을 알아보다 보니, 언제 돈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앞이 캄캄해졌다.

정부가 전세제도 전반을 살펴본다니, 일단 집주인 검증을 강화할 수 있는 장치부터 모색해보면 어떨까 싶다. 전세자금 대출의 보증 비율을 점진적으로 낮춰 금융기관들이 집주인의 상환 능력을 파악하도록 유인을 제공하는 방안 등에 지혜를 모아봤으면 한다. 물론 전세제도 개편엔 양면성이 뒤따른다. 보증 비율을 낮추면 그만큼 서민들의 전세자금 대출이 어려워질 수 있기에 주거안정 대책도 당연히 함께 고민돼야 한다. 어려운 과제이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문제 해결 노력이 필요할 때다.

sg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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