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모호한 말 [이상헌의 바깥길]

한겨레 2023. 6. 6. 18: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상헌의 바깥길]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결국 시장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끊임없는 충돌이고, 시장의 효율성은 이 충돌의 해결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경제학의 아버지가 뭐라고 했든, 경제학의 후손들은 대체로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에 집중했다. 시장에서 어느 누구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른바 완전경쟁 상황을 가정하고 분석과 조언을 쏟아냈다. 이런 모델에서는 고용도 완전해서 원하는 사람은 모두 일할 수 있다. 일자리가 없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생산성보다 높은 임금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

경제가 삐걱댈 때마다 전문가들이 애용하는 조언이다. 시장에 비시장적인 것이 개입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시간을 주면 시장이 자율적으로 해결한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그런데 이 조언을 따랐다가 문제가 악화하면 경제전문가들은 이제 정부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나무란다. 시장의 요구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해 시장이 위기에 빠졌으니 시장을 구하라고 한다. 이런 때는 보통 수천억원 이상의 나랏돈이 필요하다. 납세자 입장에서는 그놈의 ‘시장’이 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고 뺨 맞고 돈만 내주는 꼴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시장’에 대한 이런 오락가락하는 태도는 경제학의 태초부터 있었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수많은 시장행위자가 자신의 이익을 좇아 치열하게 경쟁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하다. 천 페이지가 넘는 <국부론>에 단 한번 언급됐지만 그 파급력은 유례없이 컸다.

그런데 스미스는 같은 책에서 시장에 짙게 드리워진 기업의 반경쟁적 경향을 경고했다. 말하자면 ‘보이는 손’인데, 워낙 은밀해서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야 제 몫을 받아가는 노동자의 처지와 비교된다. 그래서 스미스는 “노동자들의 단합에 관해서는 자주 듣게 되지만 고용주들의 연합에 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하는데 그건 “이 연합이 (…)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는 “법이 노동자의 연합은 금지하면서도 고용주의 연합은 허가하거나 적어도 금지하지는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이런 경우 일부 그룹의 이익만 늘어날 뿐, 시장은 비효율적이다.

결국 시장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끊임없는 충돌이고, 시장의 효율성은 이 충돌의 해결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경제학의 아버지가 뭐라고 했든, 경제학의 후손들은 대체로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에 집중했다. 시장에서 어느 누구도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이른바 완전경쟁 상황을 가정하고 분석과 조언을 쏟아냈다. 이런 모델에서는 고용도 완전해서 원하는 사람은 모두 일할 수 있다. 일자리가 없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생산성보다 높은 임금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네 탓’이다.

이런 접근은 물론 분석적 편의성의 소산이기도 하나, 심각한 정책적 편의성을 내재하고 있다. 보통 시장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할 때, 그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를 전제한다. 따라서 “보이는 손”이 넘치는 현실에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를 적용하게 되면, 반경쟁적 기업들은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시장’만 남게 된다. 즉, ‘시장’이라는 모호한 말 뒤로 반시장적이고 비효율적인 행위가 숨겨진다. 심지어 기업들의 잘못을 따지면 시장을 억압하는 것이 되고, “보이지 않는 손”을 회복하려는 조치들에는 반시장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런 모호성이 극대화되는 곳이 바로 노동시장이다.

흥미롭게도 요즘 수요독점이라는 개념을 통해 노동시장의 ‘보이는 손’에 대한 연구가 성황이다. 수요독점은 제한된 그룹의 기업들이 일자리를 지배(예컨대 광산촌)하고 있거나 노동자가 다른 일자리로 옮겨가기 힘든 상황(예컨대 육아 책임을 진 여성노동자)에서 생긴다. 완전경쟁 상황에서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생산기여분만큼 임금을 지불하는데, 수요독점 상황이라면 고용주는 생산기여분보다 적게 주면서 노동자가 계속 일하게 할 수 있다. 또한 고용수요를 늘리면 임금이 인상될 수 있기 때문에 고용을 최적 수준 이하로 유지한다. 고용주가 이렇게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활용해 임금과 고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면, 전체 노동시장은 비효율적이고 불공정해진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용전망’ 보고서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실증연구는 ‘보이는 손’의 광범위한 존재를 보여준다. 어느 나라에나 있고, 제조업에도 서비스업에도 있다. 2022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발표된 연구는 수요독점 현상 때문에 미국 제조업체는 노동자 생산기여분의 65%만을 임금으로 지불한다고 추정했다. 고용도 수요독점이 없는 상황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임금과 고용에서 노동자가 손실을 보는 만큼, 기업의 이득은 커졌다. 돌봄의무나 차별적 관행 등으로 노동시장 제약이 훨씬 큰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이런 손실은 더 심각했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한국노동연구원 홍민기의 연구를 보면, 한국의 수요독점력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다. 수요독점이 높아질수록 노동소득분배율이 줄어들어 전반적인 소득분배가 악화한다는 점도 확인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플랫폼 노동이다. 통상 플랫폼이라고 하면 무수한 수요자가 무수한 공급자를 만나는 완전경쟁시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몇년 전 미국의 대표적인 플랫폼 시장을 분석했던 연구를 보면, 플랫폼의 수요독점은 예상외로 높아서 10%에 이르는 수요자가 시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노동공급자의 수입은 자신의 생산기여분보다 13% 정도 모자라는 것으로 추정됐다.

그래서 노동시장 연구의 대가인 데이비드 카드는 “시장이 임금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더이상 타당하지 않고 “고용주가 임금을 결정한다”고 단언했다. 시장이라는 모호한 말 뒤에 숨어 있는 고용주를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얘기다. 임금이 수많은 경제 문제의 원인이라는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론은 역설적이다. 수요독점을 타파하여 노동시장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곧 노동자가 자신의 기여분만큼 공정하게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오이시디 보고서는 수요독점의 해법으로 단체임금협상과 최저임금을 제시했다. 특히 최저임금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경우, 수요독점기업들은 생산기여분 이하로 임금을 지불해 이윤을 늘리기보다 주어진 임금에서 고용을 확대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최저임금 덕분에 임금은 늘고 고용은 유지되거나 늘어난다는 수많은 실증연구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반시장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하는 최저임금이 시장의 효율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제도인 셈이다. 그래서 시장에만 맡기자는 말은 모호하고, 때로는 무책임하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