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점슛 원툴? 그래도 10년넘게 잘 살아남았습니다

김종수 2023. 6.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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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79)] '여우' 정선규

 

“확실하게 잘하는 분야가 있었는데 제대로 그것을 살릴 의지가 부족했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 몇걸음 떨어져서 돌아보니 아쉬움도 남더라고요. 임팩트와 커리어의 차이를 떠나서 농구를 했던 사람들이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어요.”


정선규(43‧178cm) 용산고 코치는 다소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잡초같은 농구인생을 살아왔다. 작은키, 약한 체력, 얇은 하드웨어 등 기본적인 신체조건에서부터 경쟁력이 떨어졌던 것을 비롯 운동신경, 기동력 등에서도 강점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테크닉이 빼어나다거나 패싱능력, 시야에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아쉬운것 투성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무려 12시즌(상무 포함)동안 프로무대에서 생존했다. 그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가진 선수들도 몇시즌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신기할 정도다. ‘강한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다’는 모 액션영화의 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딱히 대단하다고도, 특별하다고도 생각안해요. 실제로도 저는 매시즌 생존과 싸워온 식스맨에 불과했으니까요. 마음을 비우고 순간순간에 충실하다보니 그래도 가진 것에 비해 많은 기간동안 프로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지않나 싶어요. 이른바 스타급 선수들은 주변의 기대치도 있고, 본인 스스로 가져가는 커리어에 대한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것이 일체 없었어요. 가질 수도 없었고요. 그냥, 지금 이 플레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죠”


그렇다고 정선규가 아무 것도 없었던 선수는 아니다. 정말로 그랬다면 프로에서 한시즌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선규는 아주 특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3점슛’이었다. 전문 슈터로 뛰지않아서 덜 알려져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는 누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의 탁월한 슛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탑 인근에서의 3점슛은 ‘쏘면 들어간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정확성이 탁월했다. 경기내내 뛰지못하다가 갑작스럽게 잠깐 투입된 상태에서도 바로 슛감을 잡고 어렵지않게 첫 번째 슛을 던져 성공시킬 정도였다. 어찌보면 바로 이것 하나로 살아남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아쉽다. 앞서 언급한 무수한 단점중 한두가지만 장점으로 함께했다면 그의 농구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는 없어요. 어차피 바뀔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잊어버리지는 않으려고요. 솔직히 농구쪽 일을 하지않았다면 툭툭 털고 신경안쓰고 살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지금 농구 코치에요.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예전에 있었던 작은 일까지도 더듬어보고 되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멘탈적인 부분에서도 도움을 줘야할 때도 많으니까요. 함께하는 아이들은 다들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꼭 그렇게 만들고 싶고요.”

◆ 정선규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296경기 출전 평균 3.83득점(3점슛 성공률 39.7%), 0.85리바운드, 0.86어시스트, 0.49스틸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06년 11월 26일 창원 LG전 = 29득점 / 3점슛 성공 ☞ 2011년 3월 4일 원주 동부전 = 6개 / 어시스트 ☞ 2008년 3월 23일 전주 KCC전 = 5개 / 리바운드 ☞ 2007년 12월 28일 원주 동부전 = 5개 / 스틸 ☞ 2007년 10월 19일 창원 LG전 = 5개​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뭐, 운동부 코치들은 다 비슷할거에요. 이세범 선생님 잘 보좌하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 외에 별다른 일상은 없습니다.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하죠. 워낙 전통의 명문이기도하고 아이들도 열심히해서 성적도 잘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던 연맹회장기 우승했고요.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에서 우승해서 서울대표로 체전에 나갈 예정입니다.

​​​Q.지도자도 각각의 색깔이 있잖아요. 본인은 어떤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실까요?
아직은…, 제가 그런 색깔이 뚜렷하게 구분될 만큼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저역시 함께 배워가고 있는 입장이거든요.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배울 것도 한가득입니다. 다행히 고려대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좋은 분들과 함께해서 옆에서 많이 배우고 성장중이에요. 마음같아서는 맹장, 덕장, 지장의 장점만 흡수해서 배우고싶지만 욕심이겠죠?(웃음) 그냥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지않고 열심히만 할 생각입니다.

​​​Q.여리여리한 외모와 달리 목소리가 굵어요. 데이원 허재 대표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얘기는 안들어보셨나요?
그런가요? 아직은 못들어봤습니다. 그냥 생긴 것과 매치가 안된다는 얘기는 가끔 들어본 적은 있어요. 말씀 듣고나니 이른바 허재 대표님류의 목소리가 있긴하나봐요. (강)병현이도 그렇고…, 약간 굵으면서도 동굴 목소리처럼 울리는? 사람의 목소리는 본인이 듣는 것과 남이 듣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언제 시간있을 때 녹음해서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이왕 목소리 닮은 것, 현역 시절 허재 대표팀처럼 농구를 잘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아니면 병현이같은 사이즈라도…, (웃음)

​​​Q.쌍둥이 형제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 다들 쌍둥이로 알고있더라고요. 인터넷 등에도 쌍둥이로 기록이 되어있고요. 형제가 있는 것은 맞지만 쌍둥이는 아니에요. 연년생 형제입니다. 제가 동생이에요. 함께 농구를 했는데 형은 대학교때 농구를 그만뒀어요. 지금도 가끔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할 문제까지는 아닌지라, 기자님처럼 직접적으로 물어보시는 분들에게만 대답드리고 있습니다.

 

 

“제 별명이 여우였던 이유는요…”

​​​Q.초등학교 특별활동을 계기로 농구에 입문했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일주일에 한번 농구를 하면서 말 그대로 맛만 보고 있던 상황에서, 지금은 심판 은퇴하신 한규돈 선생님이 당시 농구부를 창단하셨어요. 그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죠. 처음에는 어머님께서 반대를 하셨어요. 일주일에 한번만 하다가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니까 별로 마음에 안드셨나봐요. 학교에 직접 찾아가셔서 그만둔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어릴 때라 막 간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좀 아쉽기는 하더라고요. 그러던중에 선생님께서 집을 찾아오셔서 적극적으로 설득을 시도하셨고, 부모님께서 결국 설득을 당하셨어요.(웃음) 그리고 추후에는 아버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시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학교 야외 운동장에 농구 골대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농구부가 생기면서 골대가 설치됐고…, 그냥 하면서 재미를 느끼게 된 것 같아요.

​​​Q.처음부터 포지션은 가드였나요?
그렇죠. 어릴때부터 신장의 메리트는 받지못하고 운동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초등학교 때까지는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평균 정도는 됐어요.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차이가 확 벌어지더라고요.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저보다 작은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Q.운동했던 분들 보면 학창시절에 불리던 별명같은게 있더라고요.
그렇죠. 친구들끼리도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막 부르고 그러는 시절이잖아요. 저같은 경우 선생님이나 선배님들이 ‘여우’라고 많이들 불렀어요.

​​​Q.여우요? 얼굴이 여우상이라 그럴까요?
예?(웃음)

​​​Q.예?
으하하핫…, 제가 여우상인가요? 암튼, 생긴것 때문에 여우라고 불린 것은 아니고요. 뭐랄까? 농구를 알고한다고해서 여우라고 불렸어요. 저처럼 작고 힘없는 선수가 그래도 또래 중에서 눈에 띄려면 여러모로 힘들거든요. 슛 하나 만큼은 자신있었고 거기에 더해 다른 플레이들도 센스있게 잘한다고 보셨나봐요. 어찌보면 최고의 칭찬이었던거죠. 대학 때도, 프로에 와서도 계속해서 여우가 되었어야하는데…, 저도 아쉽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신기할 정도입니다”

​​​Q.아무래도 신장에서 한계가 있다보니 포지션 선택의 자유가 없었을 듯 싶어요.

​그렇죠. 제가 프로필상으로는 180cm지만 그것은 착화신장입니다. 신발벗으면 그보다 살짝 내려갑니다. 어쨌거나 그키로 다른 포지션을 하려면 정말 말도 안되게 운동신경이 좋거나 저보다 한창 큰 선수도 힘으로 밀어내버릴 정도는 되야겠죠. 아쉽게도 제가 그럴만큼의 신체능력은 없었던지라 싫든 좋든 포인트가드를 맡아야 됐습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할만했어요. 하지만 대학교에 올라가니 여러모로 힘들더라고요. 일단 제가 몸이 탄탄한 편이 아닌지라 크게 사이즈 차이가 나지않는 동포지션 선수들을 상대로도 몸싸움에서 어려움을 좀 겪었습니다.

​​​Q.그렇다고 기술적으로 그 선수들을 사사삭 벗겨낼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맞습니다. 이미 농구로 대학까지와서 1번 포지션을 맡고있을 정도면 다들 완성도가 장난아니죠. 다들 고등학교 때까지 또래중에서 랭킹 몇 번째 소리 듣던 선수들인지라 만만하게 볼 선수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기술로 벗겨내기는커녕 제가 벗김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않았죠.(웃음)

​​​Q.거기에 스피드나 운동능력으로 상대하기에는 그 부분에서 탁월하지도 못했고요.
이것이것, 자꾸 뼈를 때리시네요. 저 까려고 인터뷰하시는 것 아니죠?(웃음) 맞습니다. 사실 좀 한다는 가드 중에서 저보다 스피드나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선수는 거의 없었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탁 터놓고 자폭모드 들어가겠습니다. 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사실이고요. 맞습니다. 뭘로해도 이름좀 있는 1번과의 매치업은 정말 힘들었어요. 제 장기가 외곽슛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앞서지못하니 마음껏 쏘지도 못했고요. 그냥 서서쏘는 슛이라면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자신이 있었지만 대학, 프로정도의 레벨에서는 그 한번의 찬스를 잡기위해 무수한 동작들이 병행되어야 하잖아요. 빈공간을 찾아들어가 빨리 슛을 던지던지, 훼이크로 속이던지, 스크린을 이용하던지 그도저도 아니면 충돌을 감수하고 다부지게 던져버려야죠. 솔직히…, 쉬운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새 커뮤니티 등에서 스테판 커리가 3점슛 하나를 던지기위해 어떤 움직임을 가져가는가라는 영상이 화제를 모았더라고요. 맞아요. 커리같은 선수도 그 한번의 슛을 쏘기위해 그 정도까지 애를 써야합니다.

 

 

​​​Q.말은 무척 겸손하지만 그래도 1라운드 9순위로 뽑혔어요. 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성장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기에 지명된 것 아닐까요?
사실 저도 지명 순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냥 뽑히기만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1라운드에 지명이 되었으니까요. 당시에는 순위를 떠나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름 운동도 많이하고 눈에 띄게 기량이 발전하던 시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 말 그대로 정체되어버렸어요. 제가 제대로 적응을 못했던 탓이 크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대가 훈련량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거기에 더해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대학기간 내내 운동을 많이 못했다고 보면됩니다. 그 와중에 프로지명이라도 된 것은 정말 천운이라고 생각하고요.

​​​Q.프로에 와서는 어땠나요?
1, 2년차때까지 거의 기회를 못받았어요. 대학교에 이어 한창 성장해야 될 때 그대로 기량이 멈춰버린거죠. 물론 누구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정말 잘했으면 같은해 드래프트되었던 (김)주성이처럼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펄펄 날았겠죠. 상무에 가면서 코트에 나설 기회가 많아졌는데 그때가 경기력이 많이 올라왔던 시기같아요. 동기들과 함께 중국 광둥성에서 개최된 2005 동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해서 5전전승으로 우승했고요. 덕분에 러시아에서 개최된 세계 군인 농구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죠. 전국체육대회 남자 일반부 결승전에서도 중앙대를 꺾고 우승했고요. 2005년 농구대잔치 결승전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모교 고려대하고 붙었는데 그날따라 컨디션이 무척 좋았어요. 3점슛 5개 포함 27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일조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좋더라고요. 제대후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되었는데 비록 식스맨이기는 하지만 그때 기회를 좀 받았습니다. 그때도 이런저런 일로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일단 게임을 많이 뛰다보니까 심적으로 훨씬 낫더라고요. 나름 열심히하기는 했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더 절박하게 할걸하는 아쉬움도 살짝 남기는 해요.

​​​Q.공격과 수비중 어느 쪽이 더 힘들었을까요?
둘다 별로였던 사람인지라(웃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개인적으로는 수비가 더 힘들었습니다. 제가 스피드가 좋은 편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각팀 주전급 혹은 핵심 1번 자원들은 대부분 빨라요. 거의 팀내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단순히 따라다니는것도 쉽지않았죠. 빠르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잖아요. 어느 포지션이든 기동성이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포인트가드는 특히 더 그래요. 코트를 가장 넓게 쓰면서 플레이하는 포지션인지라 빠르지 않은 선수는 더더욱 곤란함을 겪을 수 밖에 없죠. 그렇게 수비에서 정신없이 헤메고나면 몸과 마음이 흔들려 버리는지라 공격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많아요. 일단 머릿 속에서 아쉬운 장면들이 빙빙돌며 떠나질않으니까요. 수비가 잘되면 공격도 잘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게 아닙니다.

“장기는 3점슛이었지만 사용법이 은근히 까다로웠습니다”

​​​Q.전자랜드에서 나름 잘하다가 서장훈-강병현 트레이드때 KCC로 둥지를 옮기게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에는 좀 서운했어요. 나름 역할을 하고있다고 생각했는데 트레이드 되고 말았으니까요. 팀 성적도 당시에는 전자랜드가 더 좋았죠. 메인은 아니었지만 이제 전자랜드에 적응하나싶었는데 다른 팀으로 간다는게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필요하니까 트레이드된 것이겠지하고 금세 생각을 고쳐먹고 KCC에서도 잘 적응하려고 노력했죠, 당시 허재 감독께서 제가 슈팅력에 강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이 믿어주셨어요. 자신있게 쏘라고 독려해주시기도 하셨고요. 그래서 주로 공격이 잘 안풀리는 상황에서 출전을 했습니다. 특별한 역할이라기보다는 외곽슛 한두방, 그것을 원하셨던 것이죠. 공격이 답보 상태에 있을 때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득점이 안될 때가 있거든요. 그때 외곽슛이 하나만 들어가면 막혈던 혈이 확하고 뚫릴 때가 있습니다. 워낙 각자의 장점을 잘 살려주시던 감독님이시잖아요.
 

 

​​​Q.SK와의 경기였던가요? 경기종료를 얼마 안남겨놓고 문경은이 3점슛을 넣어서 패색이 짙어졌는데 바로 버저비터 3점슛으로 받아쳐서 극적으로 이긴적이 있었죠?
아…, 그게 아마 마지막 버저비터는 (임)재현이형이었을거에요. 제가 처음에 3점슛을 넣었고 그대로 결승 득점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한데 작전타임후 문경은 선배님이 바로 3점슛으로 응수했고 SK 벤치가 난리가 났죠. 남은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나요. 하지만 기적처럼 재현이형이 또다시 3점슛을 성공시키며 경기를 끝내버렸어요.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버저비터성 3점슛이 계속 터졌죠. 그 무뚝뚝하던 허감독님도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셨을 정도니까요.

​​​Q.3점슛 하나만큼은 전문 슈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는데 학교다닐 때부터 따로 슛연습을 많이했나요?
딱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학교는 겪어보지않아서 모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용산중고교는 연습량이 많기로 유명해요.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팀훈련을 했거든요. 개인연습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지만 따로 시간을 빼서 연습을 하고 그럴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제가 다른 능력에 비해 그나마 슛감각이 좋은 편이지않았나 싶어요.

​​​Q.단신이지만 3점슛 하나만큼은 정말 특급이었던 선수로는 조성원이 기억납니다.
신인시절 (조)성원이형이랑 같은 방을 썼어요. 그래서 형이 얼마나 노력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형같은 경우는 신체적인 단점을 극복하기위해 대학시절 웨이트트레이닝을 엄청나게 했더라고요. 프로에 와서는 조금만 훈련을 해도 그 몸이 유지될 정도였으니까요. 저렇게 노력을 했으니 저정도 선수가 되었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선배님이셨습니다. 코트 안팎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았는데, 아쉽게도 옆에서 다 흡수하지는 못했네요.

​​​Q.3점슛에 엄청 재능이 뛰어났지만 온전히 장점만을 살리기는 어려운 환경이었어요.
그렇죠. 환경이라고 하기보다는 저라는 선수가 쓰임새가 애매한 부분도 있었죠. (조)성원이형같은 경우 신체조건에 관계없이 워낙 빠르고 운동능력도 좋아서 어느 팀을 가도 토종 에이스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선수이기에 예외일 수밖에 없겠고요. (전)정규같은 경우 저처럼 3점슛 외의 능력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신장도 있고 덩치도 좋았어요. 당시 상황에서 2번을 맡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었죠. 때문에 공격시 코너로 달려가는 등 빈자리를 찾아가서 볼없는 움직임을 통한 슈터롤을 맡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같은 경우 정규같은 체격도, 성원이형같은 운동능력도 없었던지라 백업 포인트가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능수능란하게 리딩은 못하더라도, 볼운반은 해야했죠. 제가 슛찬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동료들의 찬스를 봐줘야하는 자리잖아요. 그러다가 정말 패스할 곳이 없거나 저에게 기회가 왔을 때 3점슛을 던졌고요. 그래서 주로 탑에서 슛을 쏠 때가 많았습니다.

​​​Q.은퇴하자마자 KCC에서 전력분석원과 코치를 한것을 비롯 고려대, 용산고 등의 코치를 맡았어요. 커리어에 비해 계속해서 일이 끊이질 않아서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인맥 금수저다’, ‘정치에 능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더라고요.
하하핫…, 그런 쪽하고는 전혀 관계가 멀어요. 제가 유명 선수도 아니거니와 막 살갑게 달라붙고 그런 성향도 못되요. 그냥 어떻게하든 살아남아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려고 발버둥쳤던거죠. 운은 좀 따랐던 것 같아요. 은퇴할 때 쯤 허감독님을 찾아가서 전력분석원을 하고싶다고 말씀드린 적은 있어요. 당시 팀에는 전력분석원이 없었던 시절이거든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는데 농구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하자니 막막하더라고요. 다행히 선뜻 감독님과 구단에서 기회를 주셨고 스타트를 좋게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추)승균이형이 감독이 되면서 같이 한번 해보자고해서 코치 기회도 받을 수 있었고요.
 


​​​Q.프로에서 함께한 외국인선수중 기억에 남는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전자랜드 시절에는 테런스 섀넌이 인상깊었어요. 정말 운동신경과 탄력이 뛰어났거든요. 외국인선수중에서도 돋보였던지라 같은 팀이지만 감탄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KCC에서 코치를 할 때는 안드레 에밋요. 에밋같은 경우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렸잖아요. 실력은 좋았지만 지나치게 볼을 오래 독점할 때가 있어서…, 이게 잘 풀리면 그냥 해결사인건데 농구라는게 항상 결과가 좋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렇게되면 나홀로 농구라는 비난도 많이 쏟아질 수밖에 없죠. 개인적으로 다른 것을 떠나 에밋의 훈련에 대한 열정을 높이사고 싶어요. 제가 본 외국인선수중 가장 훈련을 많이하던 선수였어요. 가장 먼저 나와서 훈련을 하고 경기 끝나고나서도 역시 늦게까지 훈련을 했죠.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땀을 뻘뻘흘리면서 슈팅연습을 하던 친구였습니다.

Q.오늘 인터뷰 너무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선규에게 ‘농구’는 무엇일까요?
나를 늘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농구가 있었기에 열정이라는 것도 불태울 수 있었고 즐거운 순간, 아쉬웠던 순간을 모두 겪었습니다. 주연보다는 조연 역할을 많이 했으며 메인보다는 받쳐주는 플레이에 익숙하지만 그런 과정이 자양분이 되어 조금이라도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가 하고있는 일이 코치인만큼 이런저런 경험을 잘살려 아이들에게 자갈길을 잘 달릴 수 있는 노하우와 멘탈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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