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병 귀신도 잡겠더라” 그 말을 남긴 6·25 종군 女기자 [송의달 LIVE]
6·25 당시 29세 ‘마거리트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 가상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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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쯤 북한은 북위 38도선 전역에서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그로부터 1953년 7월 27일 밤까지 3년 1개월 2일, 도합 1129일에 걸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간 중 사망·부상·실종된 남북한 군인만 141만명이었고, 5개 의료지원국을 포함한 21개국은 175만명 넘는 병력을 보냈습니다. 6·25는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국제 전쟁이었습니다.
이틀 후인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당시 29세의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1920년 9월~1966년 1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은 6·25 전쟁 당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였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까지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 서울 수복, 장진호 철수 같은 전쟁터를 취재했습니다.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賞)’을 받은 히긴스 기자는 ‘귀신 잡는 해병’이란 용어를 만든 주인공입니다. 그는 1950년 8월 17일 한국해병대 제1대대가 통영에 단독상륙해 북한군 제7사단을 패퇴시킨 기사에서 “이들은 귀신마저 잡을 것(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이라고 썼습니다.
◇6·25 전쟁 초기 6개월간 곳곳을 누벼
6·25전쟁 발발 73주년을 맞는 이번 달에 기자는 그의 육성(肉聲)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아래는 히긴스 기자의 저서와 평전, 기사(記事)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가상(假想) 인터뷰입니다.
- 왜 위험한 6·25 전쟁 종군기자를 자원했나?
“도쿄에서 서울행 미군 수송기를 탈 때 ‘한국은 여자에게 적합한 곳이 아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 한국행은 단순한 기사 취재를 넘어 성전(聖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동아시아특파원으로서 신문사를 대표하고 있었다. 내가 못 가거나 안 간다면 나의 존재이유가 없었다.”
1920년 홍콩에서 태어난 히긴스 기자는 7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가 UC버클리에서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로 일했습니다. 뉴욕 컬럼비아대 저널리즘스쿨을 우등졸업한 뒤 1942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를 거쳐 1944년 유럽에 파견돼 2차 세계대전을 취재했습니다. 1946년부터 베를린지국장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5월 도쿄지국장이 됐습니다.
- 한국 방문은 그때가 처음이었나?
“그렇지 않다. 도쿄에 부임 직후 5월 30일 실시된 한국 총선거 취재차 왔다. 북한군 진지(陣地)와 70m 떨어진 곳에 있는 개성 외곽의 한국군 요새 등을 찾았고 뉴욕 헤럴드 트리뷴 5월 29일자 1면에 ‘기자(記者), 한국을 갈라놓은 국경으로 가다. 빨갱이들이 말과 포탄으로 싸우는 현장을 발견’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도쿄지국장으로서 쓴 첫 번째 1면 기사였다.”
- 전쟁 초기 상황은 어땠나?
“6월 27일 내가 3명의 특파원들과 도착했을 때 미 군사고문단도 후퇴준비를 하는 등 서울은 아수라장이었다.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人道橋) 폭파로 다리를 건너던 많은 군인과 피란민(避亂民)들이 사상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간신히 나룻배를 구해 한강을 건너 도로와 산길을 22km쯤 걷고 나머지는 지프차를 얻어타 수원에 갔는데 거기에서 서울 함락 소식을 들었다.”
◇“한국이 위험한 곳 아니면 오지 않았을 것”
-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겠다?
“한강을 건너는 동안 총성이 끊임없이 울려 나는 간(肝)이 콩알만 해졌다. 피난민 대열에서 유일한 미국 여기자였던 나는 일행에 폐(弊)가 되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한국이 위험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한 사태가 곧 뉴스이고, 뉴스를 수집하는 게 내 일이다. 총에 맞는 걸 두려워해서는 기사(記事)를 따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 수원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부산 등으로 계속 후퇴했는데.
“6월 30일 밤 11시쯤 억수같은 장맛비가 퍼붓는 가운데, 덮개없는 지프차를 타고 수원에서 7시간 비포장 도로를 달려 겨우 대전에 도착했다. 머리 위에 담요를 얹어봤지만 금방 물이 새 소용없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종군기자들은 물에 젖은 강아지 꼴이었다. 추워 온 몸을 덜덜 떨었다.”
- 종군기자로서 힘들었던 일이라면?
“기삿거리 찾는 일은 전체 어려움의 5분의 1이 안 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끊어진 게 가장 힘들었다. 차량은 서울 탈출시 동료 기자가 운좋게 구한 지프차로 해결했다. 기사는 군용(軍用) 전화를 이용해 도쿄로 기사를 소리내 불러 보냈는데 전화기 한 대를 놓고 순위 다툼이 치열해 보통 2~3시간 기다렸다. 전화 사용 시간도 자정부터 새벽 4시로 제한됐다.”
실제로 28일 낮 수원에 도착한 히긴스 기자는 ‘서울 함락’ 기사 송고를 위해 미 군용기 편으로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로 갔다가 29일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수원비행장에서 맥아더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의 전용기를 보고 활주로에서 기사를 작성하던 중 만난 맥아더의 제의로 도쿄로 다시 갔습니다. 히긴스 기자는 “일본에 도착하는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 파견을 건의하겠다”는 전용기 내 특종 인터뷰 기사를 보낸 뒤 6월 30일 한국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은 기사를 작성하다가 고꾸라져 타자기 앞에 푹 쓰러진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타자기로 기사를 칠 때면 항상 기분이 날아갈듯했다. 기사 마감과 내 이름이 적힌 기명(記名) 기사가 주는 흥분(興奮)과 도전(挑戰)은 너무 매력적이었다”고 했습니다.
- 미군 스미스 부대와 북한군간의 첫 전투는 어땠나?
“7월 5일 새벽 대전을 출발해 평택을 거쳐 경기도 오산 죽미령쪽에서 벌어진 교전 현장에 갔다. 쌍안경으로 그날 오후 미군 한 명이 북한 T-34 탱크를 향해 바주카포를 조준하다가 기관총에 가슴을 맞는 걸 보았다. 19세의 케네스 섀드릭(Shadrick) 이등병이 첫 미국인 전사자였다. 1개 대대 병력 540명의 스미스 부대는 5000명의 북한 제4보병사단 2개 연대와 싸웠다.”
◇女기자에 대한 미군과 회사 양쪽의 편견
-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로서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 같다.
“나는 두 가지 역경과 싸워야 했다. 하나는 여성에 대한 미군(美軍)의 편견이었다. 워커 중장(8군 사령관)은 7월 17일 군인들을 동원해 강제로 나를 대구공항에서 도쿄로 쫓아냈다. 맥아더 원수가 추방 명령 철회 결정을 내려 나는 7월 19일 전선에 돌아왔다. 또 하나는 회사가 대선배인 호머 비거트(Bigart) 기자를 한국에 보낸 일이다. 그는 나에게 ‘도쿄로 떠나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나는 떠나지 않고 버텼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히긴스 기자는 “인천상륙작전 취재차 수송함에 타려했다가 ‘전통상 군함에는 여성의 탑승이 금지된다’며 거부당했다. 하지만 ‘객실 아닌 갑판이나 홀 한 구석에 슬리핑 백을 깔고 자겠다’며 맞선 끝에 승함(乘艦)했다”고 말했습니다.
- 종군취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나?
“딱 한 번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들었다. 그날은 ‘무혈 상륙’이 아니라 매우 위험했다. 아군의 맹포격에 적군은 기관총 발사로 맞섰다. 내가 탄 보트 위로 적의 총탄들이 날아왔다. 첫열의 해병대원들이 방파제로 기어오를 때, 사진사는 ‘내 할 일을 다 했다. 수송함으로 간다’고 하더라. 일순간 나도 그와 함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의 사격이 다시 시작돼 나는 보트에서 재빨리 내렸다.”
그녀는 저서 <War in Korea>에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데이비스, 크레인, 그리고 나는 참호에서 뛰어나와 방파제의 다른 쪽으로 20야드쯤 뛰어갔다. 그곳에서 총알을 피하는 데 안성맞춤인 약 15피트 높이의 흙무더기를 발견했다. 해병대원들이 우리 왼쪽에 있는 암벽 쪽으로 갈지자걸음을 옮기다가 5~6명이 예광탄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중략) 상륙함 한 척이 암벽 위에 있는 아군 병사 몇 명을 적으로 오인해 포탄을 발사했다. 해안에서 미친 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병사 여러 명이 맞았다.”
◇목숨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들
타자기, 벼룩약, 칫솔 등만 갖고 다닌 히긴스 기자는 땅바닥, 교실 등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여성이라고 특별한 장소나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바지와 셔츠를 몇 주씩 입었습니다. 영하 20도 아래의 혹한(酷寒)이 몰아닥친 12월 5일에는 미 해병 제5연대 소속 중대원들과의 장진호 철수에 동행했습니다.
- 죽음의 공포를 느낀 순간도 있었나?
“1950년 8월 초 경남 마산 서쪽끝 진동리에서 미 육군 제27보병연대 임시 본부가 있던 학교 건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다. 교실에서 커피 등으로 모처럼 호화스런 아침식사를 마칠 때쯤 갑자기 사방에서 총알이 폭음과 함께 난무했다. 기관총의 집중사격으로 테이블 위의 커피 포트가 날아갔다. 내가 잠잤던 간이용 나무침대 위에 수류탄이 터졌고, 총알들이 핑핑 소리를 내며 창문과 얇은 벽들을 찢고 관통해 들어왔다.”
그녀의 이어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피신하려 했으나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이 이빨[齒]들이 저절로 딱딱 부딪혔다. 울음 섞인 소리도 몇 마디 나왔다. 전쟁 중 처음 탈출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존 마이켈리스 제 27보병연대장은 8월 말 뉴욕 헤럴드 트리뷴 본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이 4시간 넘게 계속되는 동안 히긴스 기자는 임시 응급치료소로 실려들어온 많은 부상병들에게 혈장을 주입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날 히긴스 기자의 행동은 영웅적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보여준 사심(私心)없는 그의 헌신에 우리 연대원들은 매우 감사하고 있다.”
◇“대학때부터 ‘가장 뛰어난 기자’ 되겠다고 결심”
- 왜 그렇게 전쟁 취재에 열과 성을 다했나?
“어렸을 때부터 종군기자가 꿈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해 공군 조종사로 활약한 아버지로부터 전쟁 얘기와 사진들을 많이 접했다. 내가 10대 후반일 때, 40세 유명 여성 비행사의 실종 뉴스를 듣고 그녀의 신비로운 실종을 취재하러 남태평양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평범한 기자가 아닌 ‘가장 뛰어난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도 전쟁터를 누볐는데.
“독일의 부헨발트(Buchenwald)의 가스실 현장 등을 취재했고 다하우(Dachau)의 나치 강제수용소는 연합군의 도착 전에 먼저 취재하고 수감자들을 해방시켰다. 당시 취재와 봉사 활동 공로로 ‘종군 휘장(徽章)’을 받았고, 1945년 뉴욕신문 여성클럽으로부터 ‘최고의 해외 특파원상’을 받았다.”
- 6·25 취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자가 됐는데.
“6·25 전쟁 취재 등으로 1951년에만 퓰리처상과 AP통신의 ‘올해의 인물’, 조지 포크 기념상(George Polk Memorial Award), 미 해병대 예비역 장교상 등 50여개 상을 받았다. 32세이던 1952년 윌리엄 홀 미 공군 대령과 재혼(再婚)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을 일곱 차례 더 방문해 취재했다.”
히긴스 기자의 자서전을 보면 그녀는 6·25 전쟁 종군취재 후유증으로 여러 질환을 앓았습니다. 그는 “기관지염, 급성부비강염, 말라리아 재발, 이질, 황달에다 일종의 ‘사회적 해악’인 신경 긴장 발작 치료까지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16번 소련 경찰에 체포...“저널리즘을 사랑”
히긴스 기자는 이후에도 어려운 해외 취재를 주로 했습니다. 후루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네루 인도 수상, 프랑코 스페인 총통, 시아누크 캄보디아 왕자 등을 독점인터뷰했고, 스탈린 사망 후 미국 기자 가운데 최초로 소련 취재를 했습니다. 여러 달 동안 2만1000km 거리를 돌며 소련 전역을 취재했는데 소련 경찰에 16번 구금됐습니다. 그는 “어학원에서 배운 러시아어 덕분에 통역자가 없었지만 풀려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1951년부터 1965년까지 10차례 베트남을 취재했습니다. 그때마다 1~3개월씩 머물렀는데 1963년 7~8월의 경우 42곳을 찾았습니다. 히긴스 기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간섭은 잘못됐고 빨리 중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마지막 취재 중 풍토병인 리슈마니어증(혈관에 기생하는 편모충인 리슈마니어에 의한 질환)에 감염돼 워싱턴 DC 미국 육군병원에서 치료받다가 1966년 1월 45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 평생 ‘불꽃 같은 기자’였는데 어떤 마음으로 살았나?
“나는 저널리즘이란 직업을 완전히 사랑했고 어떤 것보다 더 저널리즘을 중시했다. 주 5일 근무나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저녁 먹으러 집에 가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특히 1944년부터 1952년까지 나에겐 저널리즘이 전부였다. 재미, 사교(社交) 생활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 기사에 도움되지 않으면 파티도 거절했다. 내 일을 반드시 잘 해 내겠다는 강한 욕망과 열의(熱意) 뿐이었다.”
1963년부터 뉴스데이(Newsday)로 옮겨 매주 3건의 칼럼을 쓴 그녀의 말입니다.
“칼럼을 잘 쓰기 위해 나는 하루 9~12시간 전화기를 붙들고 취재하기도 했다. 나는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 의견을 늘어놓는 것 보다는 현장 취재와 그에 대한 깊은 사고(思考)와 해석을 조합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30년 정도 앞서...남자들보다 더 큰 용기”
일각에서는 그녀가 지독히 남성 중심적이던 당시 언론계에서 출세하려고 젊음과 미모, 성적(性的) 매력을 활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의 행실을 비유한 소설이 1950년대 초 출간돼 기자 사회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6·25 당시 종군기자 동료였던 키이스 비치(Keyes Beech) 전(前) 시카고 데일리 뉴스 특파원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는 포화(砲火) 속에서도 유용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전선(戰線)을 오가며 운전할 때, 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엑셀을 세게 밟고 지프가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분투하는 동안, 조수석에 탄 히긴스는 적군의 총알 수를 세고 있었다. 결코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았던 그녀는 30년 정도 시대를 앞서 있었다.”
미국 ‘라이프(LIFE)’지 소속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단스(Mydans)는 “히긴스 기자는 가장 신성(神聖)한 영역인 전쟁 취재 분야에 침범해 들어와서 자신이 남성들과 동일하게 능력있으며 때로는 더 용기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 사실은 당시에 우아하게 수용되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가 6·25 전쟁이 남긴 교훈을 물었더니, 히긴스 기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6·25 당시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많은 무덤들은 적(敵)을 과소평가한 끔찍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승만 대통령이 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위한 수단이자 속임수’일 뿐이다. 끝으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함으로써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자명종(自鳴鐘)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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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참고한 자료
Marguerite Higgins, <자유를 위한 희생> (원제 : War in Korea·1951, 이현표 옮김·2009), <News is a Singular Thing> (1955)
Antoinette May, <전쟁의 목격자–한국전쟁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 전기> (원제 : Witness to War·1983, 손희경 옮김·2019)
Columbia Journalism Review, Daily Californian, New York Times, pulitzer.org, TIME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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