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슬픈마음 온몸으로 씻어주리
[[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밑으로 흐르는 길. 한돌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좋은 길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1]
영원토록 변치 말자던 노래가 나를 두고 떠났다. 떠나던 날 큰비가 내렸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떠나가는 노래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날이 온 것뿐이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자, 보다 못한 꿈이 내 몸을 빠져나와 떠나가는 노래를 잡으려고 뒤쫓았다. 노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꿈도 달렸다. 굵은 빗줄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길바닥을 콕콕 찔렀다. 찻길을 건너던 노래가 달려오는 트럭에 부딪혀 공중으로 튕겨 오르더니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게 다친 노래는 그대로 빗물에 쓸려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노래를 놓칠세라 뒤쫓던 꿈이 배수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2]
사람이 허수아비가 되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나를 지탱해 주는 꿈이 사라졌을 때이다. 노래도 떠나고 꿈도 떠나니 나도 그렇게 빈껍데기가 되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빈껍데기였는지도 모르지. 노래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지금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다. 23일 동안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걷는 일이다. 겉으로는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하여 걷는 거지만 사실 나는 떠나간 노래를 찾기 위해서 걷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도 희망을 만날 수 있을까? 희망을 만나면 하수도에 빠진 내 노래를 구해 달라고 해야지. 정말이지 노래가 없으니 세상 사는 낙이 없다. 무기력, 무감각, 우울증, 의욕상실증 그런 말들이 내 몸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꿈마저 몸에서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나는 걸어가는 허수아비였다.
[3]
허수아비로 걷다 보니 발바닥의 느낌이 없다. 땅 위를 걷는 게 아니라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하였다. 구름 위를 걷던 나는 갑자기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비가 쏟아졌다. 비와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나는 곧바로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하수도 안은 컴컴하고 퀴퀴했다. 내 노래와 꿈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땀처럼 눈물이 흘렀다. 피투성이가 된 노래가 보이는 듯했다. 아, 불쌍한 노래여! 미안하다, 꿈이여!
[4]
꿈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게 좋다. 꿈을 확대하여 초점이 맞지 않는 꿈으로 사는 것보다 작은 꿈이라도 초점이 맞는 꿈으로 사는 게 옳다. 원상태의 꿈으로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그 꿈이 그리워도 할 말이 없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넘치는 맥주 거품처럼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막걸리처럼 외로워도 참고 슬퍼도 참고 화가 나도 참아야 하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어리광만 부리고 있었다. 그 꼴을 보지 않으려고 노래가 떠난 것이다.
[5]
사람들은 하수도를 더러운 곳이라고 말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하수도는 더러운 곳이 아니라 더러운 것을 받아 주는 곳이라고. 하지만 내 말이 옳든 그르든 하수도는 더러움에서 헤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더러운 것들이 거기에 있으니까. 나는 사람들이 괘씸하고 밉다. 하수도를 더럽힌 것은 사람들인데 왜 하수도가 더럽다는 누명을 써야 하는지?
[6]
사람마다 외로움을 느끼는 건 비슷하지만 외로움의 냄새는 다른 것 같다. 예전에 독도에서 태풍 때문에 갇혀있었는데 며칠 지내다 보니까 외로움에서 냄새가 났다. 선반 위에 놓여 있는 그릇 냄새, 작은 창으로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한 햇살 냄새, 바람 타고 들어온 바다 냄새, 오래된 뉴스가 쌓여 있는 신문 냄새,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담배 연기 냄새, 술 냄새 등등이 골고루 어우러져 하나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자기가 가장 외롭다고 다투지 않았고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하수도의 퀴퀴한 냄새는 서로 다른 냄새들이 제각각 썩어가는 냄새들이다. 남몰래 내다 버린 사랑들, 외면당한 꿈들, 욕심의 찌꺼기들….
[7]
희망을 만나려면 절망역으로 가야 한다. 희망역에는 희망이 없으니…설사 희망이 나를 찾아온다 해도 뜨거운 길에서 다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 나는 절망역을 향해 걷고 있다. 어디 있는지 모를 절망역! 임진각에 도착하면 거기가 절망역일까? 어쩌면 지금 내가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좋은 길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지. 지나가는 새 한 마리가 나에게 말을 던지고 날아간다. “절망역은 하수도에 있어.”
[8]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자다가 저절로 꾸는 꿈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꾸는 꿈이었다. 텅 빈 머릿속에서 자꾸만 배수구가 떠올랐다. 도로 위에 쏟아진 빗물이 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쓸어가면서 배수구로 흘러들었다. 어느새 나도 하수도를 걷고 있었다. 아, 길 밑에도 길이 있구나! 한 줄기 햇살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면서 퀴퀴한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영화 속의 하수도는 넓고 불빛도 보이던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하수도는 나가는 문도,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꿈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꿈이여, 그동안 하수도에서 살아가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조금만 기다리시게. 다시 만나게 되면 내가 소낙비 되어서 그대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하수도에 밝은 등을 달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들이 서로 부딪치고 다칠 테니까. 부디 바다까지 무사히 흘러가기를… 어디선가 가느다란 빗줄기가 보였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간이역 같은 건물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낡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절망으로 찌든 냄새가 났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빛이 있었다. 어둠이 잔뜩 묻은 사람들 눈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도 사람 눈 속에는 반딧불이 같은 빛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선가 가느다랗게 기차 소리가 들렸다.
[9]
오늘도 내 몸은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저만치 임진각이 보였다. 절망역에서 기차를 타고 지금 막 하수도를 빠져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떠나간 노래와 꿈은 만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도 생겼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3일 동안 묵묵히 걸어온 동무들도 고생했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나는 땅 위에만 길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땅 밑에도 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하수도(下水道)를 우리말로 풀어보니 ‘밑으로 흐르는 길’이다.
나가는 문이 없어
너무나 컴컴해
그대 보고 싶다
꿈이었던 노래여
차오르는 외로움 속으로
옛사랑이 잠기네
그대 보고 싶다
노래였던 꿈이여
햇살을 찾아가야지
내 꿈을 만나야지
추운 내 노래도
나를 찾고 있겠지
저 햇살 따라가면
만날 수 있겠지
아, 보고 싶다
사랑하는 노래여
나는 소낙비 되어
그대를 찾아가리라
그대 슬픈 마음을
온몸으로 씻어 주리라
-<밑으로 흐르는 길>(2005)
글 한돌(음악가)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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